한일 광고인 대담: 광고가 세상을 바꾸다
<다양성(Diversity)>을 주제로 대홍기획 1호 여성임원 박선미 ECD와 덴츠 최초의 여성 CD 오카무라 마사코(Aspac Dentsu Aegis Network - Philippines)가 이메일로 특별 대담을 나눴다. 여성 그리고 광고 크리에이터라는 공통점만으로 국경을 넘은 대화에는 많은 공감이 오갔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시각과 광고인으로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역할은 무엇인지 들어본다.
박선미 ECD(이하 박선미) 마사코씨, 어느덧 봄이네요. 지난 연말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여성 광고인으로서, 또 크리에이터로서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격이 세다거나, 엉뚱하고, 개성이 강한 광고인으로서의 근성같은 것 말이에요.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광고인으로서 오랜 기간 일해 올 수 있었던 노하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오카무라 마사코 ECD(이하 오카무라)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여행가는 것처럼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고, 그 경험과 영감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지금은 ECD이다보니 팀원들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해요. 팀에게도 클라이언트에게도 성공을 맛보게 하고 싶거든요.
박선미 일본 덴츠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해외 파견을 자청했다는 이야기에 개인적으로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오카무라 국제 광고제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만난 광고인들이 “마사코, 일본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도 일해보면 좋을텐데”라고 말하더군요. 아마 일본은 특수한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웃음). 마침 태국, 중국 프로젝트로 협업할 기회가 생기면서 국적이 다르더라도 함께 일할 수 있겠단 확신이 들었습니다. 2014년 덴츠 베트남으로 발령이 났고, 토요타, 카오, 파나소닉과 같은 클라이언트를 담당했어요. 물론 베트남 최대 맥주회사인 333 맥주, 모바일, 식품, 항공사 등 베트남 현지 기업으로 캠페인을 확장해나가는 재미도 있었고요.
베트남에서 3년 정도 근무했을 무렵, 다른 해외지사에서 ECD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저도 마침 새로운 나라에서 도전을 하고 싶던 차였죠. 그 중에서 필리핀을 선택한 이유는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기 때문이에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처음 경험하는 것이 별로 없거든요(웃음). 또 다른 이유는 한 5년전부터인가 필리핀 광고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에요. 그전에는 해외 광고제에서 만난 아시아계 심사위원은 태국인 정도였는데, 필리핀 출신 광고인을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만큼 필리핀 수상작도 늘어났다는 얘기이고, 필리핀의 크리에이티브는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
박선미 마사코씨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좋은 인사이트를 주는 것 같아요. 이제 광고인, 그 중에서도 여성 광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합니다. 한국에서는 사실, 광고회사가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녀차별이 적은 분야로 알려져 있어요.
특히,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제가 커리어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여성에겐 최고의 직업이었죠. 패션이나 그래픽디자이너, 영화ㆍ방송 전문가처럼 콘텐츠 제작 영역은 전문성으로 특화된 직종이기에 대체로 차별이 적었던 것 같아요. 결과물로 능력을 인정 받기에 타 업계보다 나았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능력이면 여자보다는 남자’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죠. 일본은 어떠한가요?
오카무라 지금 일본에서는 여성 크리에이터가 늘어나는 추세예요. 제가 카피라이터가 됐을 당시엔 여성 비율이 3% 정도였는데, 지금은 30%는 될 거예요. 일본은 ‘Kawaii(귀여운) 문화’가 남녀 불문하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크리에이터로서 일하는 보람은 있거든요. [오카무라씨는 일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친숙한 일본어 Kawaii(かわいい)를 널리 유행시켰다.]
특히, 디자이너들은 광고일이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 남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덴츠에서 첫 여성 CD가 되자마자 제작 프로덕션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여성 PD직을 만들었죠. 지금은 여성 광고인도 많아졌고 ‘Producer of the Year’를 수상한 여성도 세 명이나 있어요. 하지만 ‘Creator of the Year’는 아직까지 남성들의 차지입니다. 분하지만요(웃음).
박선미 일본 광고회사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군요. 저 역시 대홍기획에서 첫 번째 여성 CD였습니다. 당시 재미있는 일도 많았는데요. 그룹사 팀장 교육에 가면 모든분들이 ‘이 직급교육에 처음으로 온 여성’이라며 신기해했고요. 좋았던 점이라면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원활했다는 거였죠. 말하는 방식이나 표현이 새롭고 부드러웠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오카무라씨도 이런 경험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일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느낀 적이 있으신지요?
오카무라 그렇게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하지만 차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막 CD가 되고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갔는데 클라이언트가 “덴츠는 우리 회사를 무시하는 건가? 이런 여자애를 보내고 말이야”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죠. 그때 담당 AE께서 “오카무라씨는 아직 젊지만 실력이 있기 때문에 CD가 된 겁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최종 결과물을 지켜봐 주십시오. 그때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거래처에서 제외하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그 클라이언트와는 오랫동안 함께 일했어요. 크리에이터는 제작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박선미 맞아요. 일의 결과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 중요한 부분 같네요. 다른 한편으로 광고시장에서 디지털매체와 콘텐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업무량이 절대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요. 그렇다 보니, 결혼 후 육아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 광고인들이 많아지고 있죠. 사실 이러한 문제는 특정 업계만의 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도가 마련되어야 기업에서도 발맞춰 갈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본이나 필리핀은 어떤가요?
오카무라 일본 역시 여성 크리에이터가 출산 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인가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안나오네요. 일본에서도 광고업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일본은 여성 국회의원의 수부터 적습니다. 여성의원 비율이 9.3% 세계 163위죠. 한국은 17%로 109위니까 일본보다는 좋은 환경이네요.
박선미 고령화 시대를 먼저 맞은 일본에서도 총리가 여성인재 중용에 대한 정책을 발표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도 국가가 나서서 저출산·고령화 극복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기업에서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죠. 대홍기획 또한 광고회사에서는 거의 드물게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고 있죠. CEO께서 나서서 일과 개인 생활의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구요. 시대에 맞는 시스템과 문화 즉, 광고 환경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시도가 늘어날수록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믿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광고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마련되는 추세인가요?
오카무라 일본 덴츠도 워라밸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밤 10시 이후 야근은 금지하고 있고, 제가 도쿄에서 일할 당시엔 워킹맘인 팀원은 오후 4:30 이후에 퇴근할 수 있도록 배려했었지요. 또 육아 휴직을 신청하는 남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좋은 트렌드라고 생각해요. 북유럽 국가들처럼 남성 육아휴직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정책 추진을 강력히 바랍니다.
필리핀은 이런 부분에서 일본보다 더 앞서있어요.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성격차지수(Global Gender Gap Report)’에서 필리핀은 10위입니다(한국 118위, 일본 114위). 여성 국회의원도 많고, 여성 대통령도 두 명이나 있었죠. 기업에서 여성 관리자 비율도 50%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필리핀은 가사와 육아를 ‘아내의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기도 쉽고, 남편들도 육아에 협조적이니까요. 저도 30대에 필리핀에 갔더라면 꼭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 인생에서 별로 후회한 일이 없는데 이것만은 아쉽네요(웃음)
박선미 참 부러운 점이네요.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과제이지만,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기업, 학교 등 사회 구성원이 함께 풀어가야 할 공동의 과제겠지요. 작년에 한 강연에서 광고를 통해 여성의 표상이 변화된 캠페인 사례를 보여주셨잖아요. 한국에서도 광고 속 여성상이 지속적으로 변해왔고, 이를 통해 사회, 문화의 변화도 알 수 있어요.
90년대 이전에 광고 속 여성은 가사일을 하는 주부가 다수였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신세대나 전문직 여성같이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상이 많이 등장했지요. 광고 속 남녀의 모습도 평등한 구도가 점점 증가되었는데 변화하는 젠더상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우리 광고인들이 더욱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고라는 콘텐츠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최근 한국의 젊은 광고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비전은 ‘광고로 세상을 바꾼다’는 거예요. 이러한 비전에 특히 ‘여성’ 광고인이 동참한다면 특유의 섬세한 시각과 아이디어로 사회 곳곳의 불편함과 부조리함을 개선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은 물론이고요. 같은 맥락에서 마사코씨도 강연에서 ‘광고계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하면 이 시대의 문화를 바꿀 수 있고 유리천장도 깰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작하신 광고 중에 이러한 역할을 한 사례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부산광역시의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임신부들이 보다 쉽게 자리 양보를 받을 수 있도록 IoT 기술을 적용한 핑크라이트 캠페인
(출처: 부산광역시 유튜브)
오카무라 전 세계 소비자의 절반은 여성이잖아요. 최근 일본에서는 여성의 가처분소득이 더 높다고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 크리에이터가 더 많아져야 해요. 여성 소비자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화장품 광고를 20년 가까이 제작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하면 많이 변화하고 있지 않나요? 휴대폰이나 생명보험 광고에서도 여성소비자를 중심으로 한 캠페인이 나오고요.
작년에 ‘베트남 여성 박물관(Vietnamese Women’s Museum)’ 광고를 제작했어요.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영어 광고가 금지되어 있는데, 박물관 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모두 여성이어서 정부를 설득해주었어요. 덕분에 베트남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베트남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지요.
박선미 제가 여성 광고인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창의성(Creativity)’ 측면에서였어요. 그 동안 광고계가 더 창의력이 뛰어난 비즈니스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창의성은 다양성에서 출발하니까요. 특히, 일본의 조직 창의성 연구의 권위자인 다카하시 마코토가 정리한 ‘이질적인 사람의 조합’에 매우 크게 공감합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이질성은 젠더거든요. 창의성에 있어 이질적인 사람 간의 창조적 마찰은 매력적인 요소죠.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마사코씨가 광고인으로 일하면서 겪은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했던 사례가 있을까요?
오카무라 저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인데요. 베트남 근무 당시에 제가 채용한 직원의 15%가 성소수자였어요. 남녀 양쪽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인으로서 장점이 있지요. 필리핀에서는 트랜스젠더 스태프를 채용하기도 했고요. 그 직원 말로는 트랜스젠더는 고용하지 않는 광고회사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직원의 섬세함이 동료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고 있어요. 또, 필리핀 여성들 성격이 밝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기 때문에 우수한 AE가 많아요. 에이전시 중에 절반 정도는 CEO가 여성이죠.
박선미 나라마다 문화의 차이로 빚어지는 문제도 다양하네요. 제3의 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단순히 젠더의 다양성이 아니라, 능력과 성과를 공정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전제가 중요할 거 같아요.
인력의 다양성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면, 한국 사회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광고 회사에도 밀레니얼 세대들이 입사하고 새로운 조직문화가 형성되고 있어요. 조직 내에서 세대간에 견해 차이가 생길 수 있는데, 이러한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요? 또한 팀의 크리에이티브를 향상시키기 위해 ECD로서 어떠한 노력을 하시는지요?
오카무라 어떠한 차이라도 받아들이는 것이죠. 인터넷 시대의 소비자들은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다양한 통찰에 귀를 기울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광고적 번역 작업’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국적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일본에만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이 정말 즐거워요.
박선미 말씀하신 ‘다양한 통찰’에 많이 공감하게 되네요. 일하다 보면, 연차나 직급에서 통찰력이 쌓인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브랜드, 제품, 타깃에 따라 인사이트가 다르니까요. 그것을 들어주는 것이 ECD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나아가 한 발 뒤에서 ‘생각의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도 ECD의 몫이고요.
‘네오마이너리즘(Neo-Minorism)’이 급부상한 것도 이러한 연장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이런 캠페인들은 나올 수 없었겠지요. 마지막으로 이 질문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디지털, 4차 산업혁명 등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고 있는데, 오늘날의 ‘광고 업(業)’을 어떻게 재정의 할 수 있을까요?
오카무라 광고는 미디어를 불문하고 우수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산업이지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선미 어떠한 시대가 와도 즐거운 삶의 가치를 제공하는 광고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 것 같네요. 메신저로만 대화하다가 이렇게 길게 생각을 나눈 적은 처음이네요. 말씀 하신 대로 시간을 내서 필리핀으로 놀러 가겠습니다. 좋아하시는 한국 막걸리를 꼭 가져 갈게요(웃음).
대담_박선미 CⓔM / 대홍기획 크리에이티브솔루션1본부
오카무라 마사코 ECD / 덴츠 이지스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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