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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행복을 팝니다

 

글 최지혜 /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석·박사, <트렌드 코리아>(2014~2023) 공저. 소비자 심리 이해와 소비 트렌드 분석에 관해 강의하고 연구한다.

 


 

“요즘 뭐 하나라도 몰입하거나 덕질하는 분야가 없다면 불행한 사람이에요.” 필자가 가르치는 트렌드분석론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한 말이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Z세대 응답자의 55%는 본인을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찐팬’이라고 대답했다(출처 2022 한국 YouTube 트렌드 결산). 유행하는 ○○에 진심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 셈이다.

사실 특정 분야에 몰입하고 덕질하는 사람은 이전에도 있었다. 애니메이션 등 특정 서브컬처를 전문가 수준으로 탐닉하는 일본의 ‘오타쿠(Otaku , オタク, 덕후)’, 공부나 과학 지식에 열심이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미국의 ‘너드(Nerd)’까지, 자기 관심 영역에 진심으로 애정을 쏟는 행동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다만 최근 몰입러들은 과거와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1인 N스크린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몰입 대상이 ‘드영만소(드라마, 영화, 만화, 소설)’에 해당하는 미디어 콘텐츠로 넓어졌다. 플랫폼을 넘나들며 본방, 재방을 챙겨보는 것은 당연하고, 0.1초 단위로 캡처해 자신과 같은 디깅러에게 희귀 짤을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한 이들의 몰입 목적은 단순히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 전념해서 즐겼음에 재미를 느끼고 이를 소통하며 자랑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공유하고 과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나 생태계는 주류 트렌드를 주도하는 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동안 마이너한 취향으로 취급받았던 덕후문화와 차별화된다는 뜻에서 최근의 몰입소비현상을 ‘파다’를 뜻하는 영단어 Dig에서 착안해 ‘디깅소비’라고 명명한다.

 

과몰입 공부법의 핵심은 컨셉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컨셉으로 삼고 최대한 몰입해 효율을 높인다. / 출처 유튜브 캡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컨셉 공부법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공주이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공부해야 백성들이 편안해진다”고 스스로 컨셉을 잡고 공주에 어울리는 옷, 머리띠, 실내 소품, 음악, ASMR(백색 소음) 등을 갖춘 후 공부에 몰두하는 식이다. 이런 ‘과몰입 공부법’은 공주 컨셉, 헤르미온느 컨셉, 로스쿨 컨셉 등 종류가 다양하다. 최근에는 Y2K 스타일이 유행하며 ‘미국 하이틴 퀸카 컨셉’에 과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 황당할 수 있지만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디깅의 핵심은 ‘컨셉’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함축적 이미지를 잡아내 컨셉으로 삼고 거기에 디깅함으로써 학습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틱톡에서도 컨셉 놀이가 뜨겁다. #POV 해시태그를 붙인 게시물이 인기인데, POV는 Point Of View의 약자로 입장, 관점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남자친구와 열애에 빠진 상황’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황’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난 상황’에 맞는 짧은 영상을 이어 붙여 하나의 게시물로 만드는 것이다. 상황에 맞는 연기는 물론이고 분장, 의상, 소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시청자가 화면 속 인물을 대면하고 있는 듯 상황의 극적인 요소를 강화해 짧지만 엄청난 반응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컨셉놀이는 관계를 지향하는 디깅으로 확장된다. 요즘에는 드라마를 볼 때도 혼자 보지 않고 서로 소통하며 시청하는 ‘소셜뷰잉(Social Viewing)’ 트렌드가 확산되는 추세다. 소위 파티 문화가 발달하고 있는데, 웹툰에서도 이러한 소통이 시도되고 있다.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은 자사의 웹툰 플랫폼 ‘만화경’에 원격 소통 기능을 추가했다. 이러한 소셜뷰잉 공간은 디깅러들이 한데 모여 마음껏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어 준다.

 

우아한형제들이 2019년에 론칭한 웹툰 플랫폼 <만화경>. Z세대가 원하는 디지털 놀이공간에서의 소통에 초점을 맞춰 웹툰 장면별 피드백 기능인 구름톡, 사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생산해 올릴 수 있는 태그톡 기능을 신설했다. / 출처 우아한형제들

 

디깅러들이 모이기 시작하며 관련 플랫폼 시장도 커지고 있다. 취향 공유 덕질 플랫폼 ‘콜리(Colley)’는 해리포터, 짱구, 디즈니 등의 캐릭터 IP를 활용한 자체 콜리샵을 운영한다. 여기서 판매하는 ‘only 콜리’ 굿즈들은 해당 앱을 통해서만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캐릭터 제품을 수집하는 디깅러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곳으로 인식된다. 또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K팝 아이돌과 가수의 팬덤 커뮤니티 ‘케이타운포유(케타포)’가 문을 열어 화제다. 케타포는 K팝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240여 개국의 팬들과 함께 플랫폼 내에 4,500여 개의 팬클럽 커뮤니티를 개설했고(2021년 말 기준), 앨범과 굿즈를 판매해 K팝 콜렉터들의 아마존을 지향하고 있다.

특정 분야에 몰입하고 덕질하는 디깅소비는 이제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디깅러들이 시장의 주류로 부상해 관련 산업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특히 기업과 브랜드는 이들이 관심사와 취향 기반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정보 공유와 관련 소비가 발생하면 또 다른 비즈니스 기회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커뮤니티 내에서의 결속력이 기업과 브랜드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연계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디깅문화가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행복 연구로 유명한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인간의 행복은 마음속에 관심 있는 대상이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대상을 향해 스프링처럼 튀어나갈 준비가 됐을 때가 행복한 상태”라고 한 바 있다. 세계적인 불황이 예측되는 2023년, 일상의 어려운 순간을 단번에 행복으로 바꿔줄 ‘디깅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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