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얼굴은 다양하다. 바람 불어오는 평상에 누워 수박을 먹는 것도, 더위에 지치고 땀에 절어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것도 모두 여름이다. 이렇게 다양한 여름에 어울리는 영화를 추천해본다.
불쾌지수가 치솟을 때 <데쓰프루프>
‘참교육’ 정서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쾌감이 있다. 거칠 것 없이 달리는 자동차 질주씬에 절로 시원해지는 기분은 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중에 최고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 계속 눈길이 가는 묘한 영화다. 쿠엔틴의 영화답게 꽤나 잔인하므로 심약자는 주의해야 하지만 입맛에 맞는 사람에게는 살얼음 낀 사이다를 단숨에 들이켜는 듯한 쾌감이 있을 것!
잠들지 못하는 열대야엔 슬픔에 침잠하기 <애프터썬>
경험과 이해 사이엔 시차가 있어서 인생의 어떤 장면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이해되기도 한다. 아빠와 함께 터키로 떠났던 열두 살의 여름을 떠올리는 소피. 어른이 된 그녀는 그때의 아빠를 헤아리게 될까. 이미 타버린 피부 위에 덧바르는 선크림처럼 이미 타버린 마음 위에 차분히 덧씌워보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 작년 광화문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보는 동안엔 몰랐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조용히 무너져 내린 기억이 있다. <애프터썬> 이후 나에게 여름은 더 이상 눈부시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프랑스 별장과 와인 농장 그리고 여인 <어느 멋진 순간>
런던의 성공한 펀드 매니저 맥스. 어느 날 그에게 삼촌의 오래된 와인 농장이 유산으로 상속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맥스는 농장을 팔아버릴 심산으로 프랑스로 향한다. 한 번의 역류 없이 아름답게 흐르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 포인트는 감독이 리들리 스콧이라는 사실. 의심 반, 호기심 반에 시작하더라도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이 여름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들고 이내 달콤하게 엉겨들 것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어린이와 함께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어린이와의 영화 감상은 특별하다. 어린이의 추억 속에 함께 편집되어 영원히 상영될 기회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나 역시 어릴 적에 본 수많은 디즈니 만화영화 속에 엄마의 얼굴이 함께 편집되어 있다. 기나긴 여름 방학에 어린이가 지루해하거나 더위에 짜증 낼 때, 함께 옷장을 열어보자. 옷장 뒤엔 한 겨울의 나니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흥미진진한 모험에 현실 속의 미지근한 지루함이 환상처럼 느껴질 때 즘이면 알 수 있다. 당신이 어린이의 추억에 함께 편집되었다는 것을.
여름엔 역시 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세 자매 앞에 존재도 몰랐던 이복 여동생이 나타난다. 서로 너무 다른 우리는 과연 가족이 될 수 있을까? 별 것 아닌 이야기와 일상들을 고운 태피스트리로 엮어내려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을 러닝타임 내내 느낄 수 있다. 거대한 파도도 엄청난 해일도 없지만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잔물결이 아름다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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