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공기가 차가움으로 변해버린 지점이 어디였는지도 모를 만큼 계절이 지나가는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는 요즘이다. 가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모두 사라진다면 청명한 가을 하늘과 햇살을 머금은 낙엽이 어떤 의미로 이야깃거리가 됐는지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역사가 될 것이고 인생에서 특별한 순간 중 하나를 잃는 상실감마저도 어느샌가 잊히겠지만, 그럴수록 잊히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더욱 열렬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아이러니 또한 생기는 것 아닐까 싶다.
찰나의 빛나는 순간을 목도한 후 그 여운을 길게 간직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화처럼, 오늘은 어떤 의미로든 가을을 닮은 영화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약간의 스포가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자그마한 시간의 조각들이 하나의 계절을 만들어내듯 개개인의 삶 또한 무수히 많은 레이어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위대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한다.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는(물론 외형만) 설정만 제외하면, 하루 동안 일하고 퇴근 후 여흥을 즐기며 소박한 가정을 꾸리는 장면을 그리는 방식에서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고 얘기하는 듯한 감독의 의도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생의 필름이 모두 지나간 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눈을 감는 벤자민 버튼의 마지막을 보고 있자면 분명 슬프지만 그것 만으로 단언할 수 없는 강력한 감정의 변곡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하루마다 냉기와 온기를 번갈아 머금는 가을의 온도를 닮았다.
스포트라이트 (2015)
이 영화를 MBTI로 얘기하자면 T와 F가 혼재돼 있는 특이함을 갖고 있다. 실화를 소재로 선택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태도와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하지만 ‘개인의 도덕적 기준을 근거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음에도, 모두가 진실을 외면할 때 개인의 도덕성이 집단 속에서 발휘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시사하는 지점에서는 너무나 뜨겁다. 이 영화는 굉장히 건조해 자칫 자그마한 불씨에도 쉽게 불길이 번지기 쉬운 가을의 공기를 닮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2017)
‘사랑’은 누구에게는 네모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동그라미일 수 있다. 사뭇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것들의 차별 없는 화합을 담아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이 이상한 동화는 인종을 넘어 종족(!) 간의 감정을 교류하는 기괴함 속에 모두의 사랑이 같은 모양일 수 없다고 말하는 유려함을 담아냈다. 백 마디 말보다 2시간 동안 영화적 다양성의 극단을 한 번 느껴보시길(<판의 미로>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영화도 강력 추천한다). 이 영화는 벌레 먹어 구멍 뚫린 오색 찬란한 가을의 낙엽을 닮았다.
아무도 모른다 (2005)
어른으로부터 비롯된 슬픔을 감내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 무렵에 다다르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현실’ 앞에서 모든 감정을 소진해버린 공허한 눈동자만 남을 뿐이다. 영화는 사회 공동체적 책임으로 관객을 겨냥하고 마땅히 각자 감내해야 할 양심의 조각들로 폐부를 찢는다. 모두가 상처 입은 다음 다시 돌아온 현실은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같은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내리쬔다. 이 영화는 낙엽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버린 늦가을의 나무를 닮았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가을의 서늘함과 건조함에 지쳤다면 말랑말랑한 일상 첩보물(!)인 이 영화를 한번 감상해보시길 바란다. 너무나 어중간해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쓸모가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본 B급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힘 빠지고 헛웃음 나오는 개그들은 덤. 2000~2010년대에 리즈 시절을 보냈던 우에노 주리와 아오이 유우의 풋풋한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이 둘은 다음 해에 개봉한 <무지개 여신>이라는 작품에서 자매로 다시 한번 만난다). 이 영화는 건조할 때마다 한번씩 내려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가을비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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