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없어지면 나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진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이의 글로 서두를 연다. 신형철이 말하는 없음의 철학은 비단 사랑의 세계에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채움을 고민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비움을 결단하는 일은 무척 고단하고 어렵다. 브랜드를 약속하고 제품의 USP를 설명하고 소비자를 설득하는 것이 본업인 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없음’은 시끌벅적하거나 휘황찬란한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단호하고 묵직하게 제 존재를 드러낸다. ‘없음의 존재’라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들릴지 모르나, 없음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광고들은 우리 주변에 반드시 있다. 메시지가 없고, 브랜드가 없고, 카피가 없고, 소리가 없고, 비주얼이 없는 광고. 없는 게 매력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광고. 이번 이야기는 결연하게 모든 것을 비워낸, 없는 광고에 관한 이야기다.
소리ㆍ비주얼 없는 광고
Coca-Cola : TRY NOT TO HEAR THIS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맛보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알고 있다. 코카콜라의 선명한 레드컬러와 온몸의 신경을 자극하는 청량한 탄산 소리, 짜릿한 바로 그 맛까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는 매력을 굳이 또 한 번 들려주고 다시 보여줄 이유는 없다. 그렇게 탄생한 코카콜라의 캠페인을 소개한다.
첫 번째 편은 소리를 배제한 광고다. 톡톡 튀는 탄산에 집중된 코카콜라의 비주얼에 우리는 마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두 번째 편은 반대로 비주얼을 없앤 광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사운드에 집중하면 누군가 코카콜라를 마시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다. 하나의 감각을 최소화해 또 다른 감각을 극대화하는 놀라운 기술. 오감 만족의 재해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코카콜라는 역시 이번에도 코카콜라다웠다.
주인공 없는 광고
Audi : What do you want in a car
없음의 고전을 소개한다. 자동차 광고라면 무릇 시원한 주행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쭉 뻗은 아우토반을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와 멋진 카피 한 줄. 이 당연한 조합이 자동차 광고의 전형이지만, 아우디는 그 공식을 탈피했다.
순차적으로 놓이는 타 브랜드 자동차 키링과 함께 등장하는 브랜드별 강점 네 가지. 그리고 마침내 동그라미 네 개가 더해지면 아우디 로고로 완성되는 심플한 플롯. 힘을 뺄 줄 아는 자만이 진짜 힘 있는 자라는 걸 이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아우디의 잘 빠진 자동차 한번 등장하지 않지만, 아우디가 가진 네 가지 매력을 강렬하게 전달한 광고. 또 한 번 고전을 통해 한 수 배운다.
메시지 없는 광고
AN-NAHAR : The Blank Edition
시원하게 모든 것을 비워낸 광고를 만나보자. 그 어떤 위대한 카피도, 비주얼도, 크리에이티브도 백지에서 시작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 캠페인은 무려 백지 그 자체다. 레바논의 독립신문 An-nahar에서는 정파 싸움으로 정부 구성을 못하고 있던 정치인들에게 대담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기사 한 줄, 헤드라인 하나, 그 어떤 메시지도 인쇄하지 않은 새하얀 블랭크 에디션을 출간했다.
시민들은 블랭크 에디션의 공백을 자신들의 목소리로 채워 SNS에 업로드했고, 곧 전 세계가 레바논의 정치적 상황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묵직한 헤드라인의 힘을 능가하는 백지 신문으로 파격을 선보인 블랭크 에디션. 이 캠페인은 2019년 칸 광고제 퍼블리싱 부문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대화 없는 광고
Burger King : Silent Drive Thru
말 한마디 없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다. 소비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고, 어느덧 언택트 테크놀로지를 경험하고 있다. 핀란드 버거킹에서는 햄버거 주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한 스몰 토크를 없애주는 Silent Drive Thru를 오픈했다.
고객들은 앱을 통해 주문한 뒤 주차장에서 조용히 자신이 주문한 햄버거를 픽업해간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핀란드 사람들의 특성과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의 간편함을 잘 접목한 재미있는 시도. 이번 캠페인은 앱 출시 한 달 만에 판매량 2배를 달성하고, 모바일 시스템에 소요되는 주문 시간을 7~8분가량 단축하는 성과를 얻었다.
1952년 8월, 뉴욕 우드스톡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음악 하나가 있었다. 무대 위로 등장한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가만히 고요와 정적을 지키다가 정확히 4분 33초 후 피아노 뚜껑을 덮었다. 공연장은 의아해하는 관객들이 술렁이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의 연주가 됐다. 이 곡이 바로 소리 없는 음악이라는 실험적 발상으로 완성한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다. 텅 빈 오선지에서 태어난 침묵의 소나타는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없음으로 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비어있음으로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신형철이 말하는 사랑의 세계가 그렇고, 존 케이지의 음악이 그러하며 우리가 오늘 만나본 광고들이 그렇다. 우리는 이제 빈 캔버스가 형형색색의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오늘은 세상의 수많은 크리에이터에게 존 케이지의 악보에 적혀있던 라틴어로 끝인사를 전한다. TACET. 아무것도 연주하지 말라.
'WORK > AD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후의 세상이 온다면 (0) | 2020.06.03 |
---|---|
호모픽투스에게 꼭 필요한 것 (0) | 2020.04.01 |
[AD KEYWORD]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0) | 2019.12.19 |
[AD KEYWORD] 승부보다 중요한. (0) | 2019.11.05 |
[AD KEYWORD] 광고는 여전히 중요하다 (0) | 2019.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