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민용준 / 프리랜서 칼럼니스트. <에스콰이어> 매거진 피처 디렉터를 지냈고 영화,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 미디어, 트렌드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연,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택진이 형처럼 용진이 형이라고 불러 달라” 여기서 택진이 형은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 용진이 형은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이다. 올해 초까지 문전성시를 이루던 음성기반 SNS 클럽하우스에 직접 등판한 정용진 부회장이 일면식 없는 일반인의 호형호제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바야흐로 ‘관종’의 시대. 관심종자의 줄임말인 관종은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끄는 이들의 존재감을 재화가치로 책정하는 시대다. 덕분에 셀러브리티보다 인플루언서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진 요즘은 영향력 자체가 거대한 가능성으로 평가된다. 유명 연예인에게 주어지던 광고 제안은 유튜브 채널 구독자나 SNS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까지 후보로 삼은 지 오래다. 개개인의 영향력이 기성 미디어보다 효율적인 광고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파급력은 보다 공고해진다. 이를테면 이미 유명세를 가진 셀러브리티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구독자나 SNS 팔로워는 빠르게 급증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건 무명의 일반인만이 아니다. 이미 영향력이 있는 유명인들도 SNS를 통해 직접 소통하며 영향력을 강화한다. 전문직 종사자는 물론 기업가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정용진 부회장은 클럽하우스에 직접 등판해 SSG 랜더스에 대한 계획을 스포하고, 새로운 호텔 사업에 친분이 있는 유명 미식 블로거를 영입하는 등 활발한 개인 SNS 활동으로 유명하다. CEO의 관종 기질이 사업적으로 시너지가 되는 시대를 만나 정용진 부회장은 그 자체로 좋은 마케팅 소재가 됐다. CEO가 공적으로 인기 있는 캐릭터로 인식된다면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게 당연한 시대다. 신세계푸드가 정용진 부회장을 모티브로 만든 ‘제이릴라’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발매하며 캐릭터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런 배경에 있다. 스스로 관심받기를 즐기는 CEO가 자신의 영향력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파급력을 확장할 수 있음을 잘 이해한 것이다.
이렇듯 일선의 CEO를 앞세워 마케팅하는 ‘PI 마케팅(President Identity Marketing)’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이는 산업이 변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기업 중 시가총액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기업은 1위 애플, 2위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아마존, 알파벳, 페이스북, 텐센트, 테슬라 등 대부분 IT 기반 기업이다. 이들은 기술 혁신을 통해 스타트업에서 유니콘으로 빠르게 성장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경험의 한가운데에는 기술 기반의 혁신적인 경영을 이끈 리더가 있다. 기술적 역량을 가진 인재가 아이코닉한 기업가로 변모하는 성장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티브 잡스는 물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CEO로 기업이나 브랜드만큼 그 이름도 자주 언급되며 존재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징적인 기업가를 넘어 대중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재계의 대기업 CEO 중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영향력의 온도가 다르다. 마치 건국신화를 가진 팝스타 같다.
혁신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을 재편하고 새롭게 성장한 기업 이미지란 결국 그러한 혁신을 주도한 사람의 상징성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카드회사의 이미지를 보다 쿨하게 만든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 역시 그런 사례로 유효하다. 차별화된 카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현대카드는 다양한 문화사업과 발 빠른 디지털화를 통해 리브랜딩에 성공했다. 이는 조직문화 개선과 인재 영입에 주력한 정태영 부회장의 역량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그는 대중적인 소통을 즐기는 CEO이기도 하다. 정용진 부회장이 이슈메이커라면 정태영 부회장은 브랜딩 철학가 같은 인상이랄까. 클럽하우스에 꾸준히 등장해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비하인드 썰’과 같은 경영 전략의 후일담을 공개하거나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디지털 전략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며 적극적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이는 결국 현대카드의 브랜드 철학을 지지하는 소비자의 신뢰를 결속하는 셈이다.
CEO의 얼굴을 내건 PI 마케팅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자사 광고에 직접 출연한 마켓컬리 김슬아 대표, 자사 유튜브 채널 내 본인의 이름을 건 코너에 출연하는 롯데홈쇼핑 이완신 대표,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 자사 편의점 CU를 오픈하며 아바타를 등장시킨 BGF리테일 이건준 대표 등 CEO는 이제 회사의 전면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해내고 있다. 모두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흐름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CEO 리스크를 관리하는 기업의 역할도 중요해질 것이다. CEO가 회사의 이익을 담보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인플루언서가 된 만큼 CEO의 윤리적 문제나 도덕적 논란은 회사에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는 악영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결국 CEO는 기업을 경영하는 존재이자 기업의 관리 대상이 되는, 마치 연예인과 매니지먼트사의 관계로 재편된 셈이다. 물론 여전히 은둔 경영으로 기업을 이끄는 그림자 같은 CEO들도 존재하지만, 개개인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이를 즐기는 시대에 관종 CEO의 출현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미있는 건 결국 팔리게 돼 있다. 친근한 인상의 CEO가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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