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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비건은 용기의 합이다

 

글 박윤진 CⓔM / 대홍기획 크리에이티브솔루션3팀

 


 

내가 힙하지 않은 이유야 수도 없이 많지만 몇 가지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망원동 또는 연남동에 살지 않는다 ② 비혼족이 아니다 ③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④ 쿨하지 못하게 댕댕이를 좋아한다 ⑤ 그 흔한 타투가 없다 ⑥ 내 이름을 걸고 낸 독립출판물이 없다 ⑦ 서핑을 즐기러 양양에 가지 않는다 ⑧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비건이 아니다.

비건은 원래 완전한 채식주의를 뜻하지만 요즘 쓰이는 비건이라는 단어는 먹는 방식 그 이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채식은 기본,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제품을 고르고, 비건 소재의 옷을 입으며, 환경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등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사려 깊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비건이라 부른다.

대한민국에서 비건으로 살아간다는 건, 힙이 아니라 용기의 합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소고기 부위별 명칭만 40가지가 넘고 고기에 ‘꽃’을 붙이는 민족이다(꽃등심, 꽃갈비).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하고 어차피 인생은 다 ‘고기서 고기’라며 고기로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민족이다. 이렇게 고기를 숭상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 홀로 당당히 채식주의를 선언할 수 있는 용기,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 굳건히 비건 라이프를 주창하는 용기, 나를 희생해 다른 생명을 살리는 비건이란 얼마나 담대한 용기의 집합체란 말인가.

 

비건 패션을 소비하는 용기

H&M은 최근 게임형 메타버스인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새로운 비건 컬렉션을 소개했다. 2030년까지 100% 재활용 또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소재만을 사용하겠다고 밝힌 후 모동숲에 의류 리사이클링 스테이션인 루프 아일랜드(Looop Island)를 만든 것이다. 이번엔 비건 소재의 퍼 재킷과 털 스카프, 가죽 블레이저가 등장하는 비건 패션쇼를 열었다. 비건 컨셉은 게임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드러난다. H&M의 루프 아일랜드는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낚시나 사냥은 금지, 식당에선 오직 비건 식품만 제공된다.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받던 패스트 패션의 오명을 벗고 시대에 어울리는 비거니즘 브랜드로 거듭나고자 노력하는 H&M의 의지를 귀엽게 보여준 사례다.

 

 

동물실험에 반대할 용기

비건은 기본적으로 ‘존중’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나 자신의 건강에 이로운지보다 다수에게 이로운지 아닌지를 먼저 살핀다. 특히 지구라는 플랫폼을 공유하는 동물들의 ‘동물권’을 중시한다. 동물을 원료로 하거나 착취를 통해 만들어진 제품은 소비하지 않는다. 먹는 것, 쓰는 것, 사는 것, 살아가는 방식까지 동물권을 지키려 노력한다. 여기 동물권에 무지했던 내 생각을 뒤바꾼 단편 애니메이션이 있다. 인간을 위한 희생과 실험실에서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토끼 랄프의 이야기다. 동물실험? 토끼의 눈가에 예쁘게 마스카라를 발라주는 거 아닌가? 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던 나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영상이다. 작고 여린 생명을 짓밟고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후변화에 행동할 용기

비건은 언제나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다. 아마 최근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논의에도 눈과 귀를 열었을 것이다. 아래는 COP26에서 상영된 오프닝 영상이다. 지금 이 시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후변화로 인한 위태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다. 미국과 호주를 덮친 화재, 이탈리아의 홍수, 그린란드의 녹아 버린 빙하, 중국의 미세먼지까지. 기후위기는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닥친 오늘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충격적인 영상이다.

 

 

누군가 그랬다. 한 사회의 수준은 가장 약한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해진다고.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한 사람의 수준 역시 가장 약한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해진다.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인간이 폭력성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되짚으며 우리가 점점 선한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서술한다. 나 자신을 희생해 다른 종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태도는 어쩌면 가장 진화한 인간성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나도 완벽한 비건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건 지향의 삶까지는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고기를 먹지 않고, 가죽이나 동물 털 대신 비건 소재의 의류를 입고, 탄소 배출을 줄이고 환경을 생각해 제품을 생산하는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 이 세상의 용기 있는 비건들을 향한 헌사로 어느 연설문의 일부를 바친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다시금 손길을 뻗는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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