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지영 /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UNCG) 마케팅 전공 교수. 저서 <리테일의 미래> <리:스토어> <잘파가 온다> 외.
엔데믹 시대로 접어든 2023년과 2024년 상반기는 예상외의 전쟁, 경제와 기후위기 등으로부터 촉발된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불확실성은 예상 가능한 범위 밖의 상황을 말하며 위기를 동반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지금의 상황은 미중 갈등, 이스라엘 전쟁, 고물가, 경제 침체 등 경제/사회/정치/환경 등의 사건이 복잡하게 맞물린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 다중복합위기) 상황이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화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무력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의 행동도 달라지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은 어떻게 변화할까?
불황형 상품과 작은 프리미엄 소비
팬데믹 기간을 생각해보자. 2020~2022년 말까지 3년 동안 전 세계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2020년 7월~2021년 6월 동안 100만 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실직률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 기간에 특히 복권이 많이 판매됐다. 필자가 거주하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경우 복권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6%나 늘었다. 한국에서는 팬데믹 동안 즉석 복권의 인기가 치솟아 2022년 당초 계획보다 복권 발행을 611억원 가량 늘렸다.
반면 한국에서는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비타민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오쏘몰 이뮨이 1회분에 5천 5백원 정도로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2020년 론칭 이후 매해 2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후 2023년 한국 국내 멀티비타민 부문 판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복권 같은 불황형 소비와 작은 프리미엄 소비가 특징적이었던 것이다.
더 작고 더 빠른 소비가 늘어난 이유
경제학자들은 명품 립스틱 구매 증가와 남자 속옷 판매 하락을 경제 침체의 신호로 보아왔다. 그러나 최근 나타난 프리미엄화 현상은 과거와 양상이 조금 다르다. 특히 식생활에서 ‘프리미엄 그로서리(Premium grocery)’ 현상이 특징적이다. 미국 대형마트에서 프리미엄 소고기와 고급 디저트 판매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위스키를 포함한 고급술 판매가 늘었다. 그 이유는 프리미엄 식료품과 술은 소비자의 경제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취할 수 있는 작은 럭셔리(Attainable luxury)’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 작은 프리미엄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심리적으로 더 쉽게, 그리고 더 가깝게 느껴지는 확실한 것을 통해 잃어버린 삶의 주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심리적 기저 때문이다. 팬데믹 동안 한국의 Z세대 사이에서 일명 갓생(god+인생) 살기가 유행하는 것도,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지자 새벽 6시에 일어나기, 따뜻한 차 마시기, 10분 요가하기 등 여러 가지 루틴을 실천하는 것도 소소한 성취감을 얻으며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고 삶을 회복하려는 기저가 밑바탕에 놓여있다.
게다가 불확실성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장기적 관점보다 단기적 관점에서 ‘짧은 행복’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지금 나에게 ‘뭔가 특별한(Something special)’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을 원하게 된다. 3년 간의 팬데믹 동안 작지만 특별한 사치, 작은 프리미엄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던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으로 이끌면, 이런 메커니즘은 사라진다. 실제로 한 소비자 실험에서 안전한 상황일 때와 코로나19처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참여자들의 결정을 비교해보니,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작지만 빨리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런데 불확실성이 높아진 조건에서도 미래지향성(Future orientation)을 높이면 작지만 빨리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경향이 줄어든다. 즉 미래까지 내다보는 장기적 관점이 결여되는 불안정안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작고 더 빨리 얻을 수 있는 이득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선택을 통해 줄어든 통제력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또 다른 소비 패턴은 다양한 옵션을 선호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증가하면 소비자는 자신의 힘과 통제할 수 있는 권한, 즉 파워(Power)가 줄었다고 느끼게 되는데, 소비 맥락에서는 다양한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통제감과 자율성을 회복하게 된다. 하버드대학교 교수진의 연구를 보면 본인이 ‘파워가 없다(Powerless)’고 느끼는 참가자일수록 다양한 맛의 초콜릿 박스를 선택하는 확률이 20% 정도 높았다.
반면 본인이 ‘파워가 있다(Powerful)’고 답한 참가자들은 맛의 종류가 적은 초콜릿 박스를 선택했다. 파워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언제든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불확실성 속에서도 다양한 맛을 원하는 경향이 적은 반면, 파워가 없다고 느끼는 소비자는 줄어든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의 추가 실험에서 ‘파워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주체성을 되찾게 하는 광고 슬로건을 읽게 하니 다양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사라졌다. 즉 자율성이 향상되면 다양성 추구 경향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노스탤지어 소비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노스탤지어(Nostalgia) 소비 역시 불확실성 속에서 나타나는 소비 패턴이다. 노스탤지어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기억을 의미한다.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좋았던 기억을 연상하게 되며 마음의 안정이나 기분 전환 등 긍정적인 감정으로 연결된다. 이럴 때 고객들은 마음을 연다. 최근 노스탤지어를 추구하는 경향은 특히 패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에서는 Z세대가 1990~2000년대에 유행한 맥시스커트, 어그 부츠, 밑위가 짧은 배기 청바지,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프레피룩 등의 인기를 부활시켰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 1990년대에 유행했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나 리, 스톰 등 X세대 유행 브랜드가 다시 론칭돼 인기를 끌었다.
Z세대 중심의 노스탤지어 맥락의 브랜드에 대한 재조명은 Z세대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 아네모이아(Anemoia)로 보기도 한다. 교복, 옥상, 매점 등의 요소로 1990년대 학교 감성을 그대로 재현한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가 90년대를 살아보지 않은 Z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아네모이아뿐 아니라 Z세대가 특히 최근 암울하게 느끼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성(Escapism)과 맞물려 노스탤지어 경향이 더 두드러진 것으로 해석한다.
마케터가 고민해야 할 지점
이러한 소비 패턴의 변화를 고려해 기업은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우선 상품의 옵션을 다양화해 여러 선택지 중 소비자 본인의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프로모션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디스플레이한다면 판매하는 아이스크림의 퀄리티나 할인 여부를 강조하는 것보다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카페에서는 원두의 선택지를 늘린다면 고객이 매일 마시는 커피지만 다양한 선택지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다.
또 다른 전략으로는 노스탤지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되, Z세대의 특성과 결부시킨 마케팅을 진행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Z세대가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즐기는 심리적인 기저에는 스마트폰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디지털 디톡스에 대한 니즈가 존재한다. 또한 AI와 접목해 과거를 초현실적으로 렌더링 하고 재해석한 빈티지 감성을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경기 침체처럼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이르는 상황은 언제 다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숙명 같은 현상이다. 이런 시점일수록 단기적 성과에 매몰되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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