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지혜 /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석·박사, <트렌드 코리아 2014~2024> 공저. 소비자 심리 이해와 소비 트렌드 분석에 관해 연구하고 강의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라는 말이 의미하듯 인간은 재미를 좇는 존재다. 놀고자 하는 욕망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사람들의 재미추구 행동은 과거와는 종류나 깊이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은 더 다양한 활동에서 재미를 추구하며 재미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비행태를 일컬어 ‘도파밍(도파민+파밍)’ 트렌드라 명명한다.
‘도파밍’은 도파민의 오타가 아니다. ‘도파민(Dopamine)’과 ‘파밍(Farming)’을 결합한 말이다. 도파민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경험할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을 의미한다. 파밍이란 게임 용어로써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농작물을 수확하듯 아이템을 모으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도파밍은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도파민이 분출될 수 있는 행동이라면 다양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의 범람
숏폼 콘텐츠의 성장은 도파밍 트렌드의 대표적인 사례다. 예컨대 예전에는 일요일 저녁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아 ‘개그콘서트’를 시청하는 게 유일하게 재미있는 콘텐츠였다. 반면 요즘은 각종 플랫폼에 각양각색의 재미있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이런 콘텐츠의 길이는 계속 짧아지고 있다. 15초 내외의 짧은 길이로 큰 성공을 거둔 틱톡은 물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도 릴스와 쇼츠를 선보이며 우리의 ‘1분 1초’를 가져가고 있다. 글로벌 크리에이터 전문 기업 콜랩아시아에 따르면 2020년 유튜브가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인 쇼츠를 선보인 이후 2023년 1월 기준으로 유튜브 시청자 뷰의 약 80% 이상이 쇼츠에서 발생하고 있다. 또 유튜브 쇼츠 출시 이후 한 시청자가 60초 분량의 쇼츠를 10번 이상 보는 빈도가 약 10분 길이의 유튜브 영상 한 편을 보는 경우보다 급격히 늘었다. 자극적인 재미를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됐다는 뜻이다.
콘텐츠뿐만이 아니다. 최근 맵도르핀(매운맛+엔도르핀), 맵파민(매운맛+도파민) 같은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점점 더 매운맛을 찾으면서 레벨을 높이는 재미를 추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편의점 CU의 매운맛 상품 매출신장률(전년 대비)을 보면 2021년 15.6%에서 2022년 21.3%, 2023년 27%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GS25가 판매하는 상품 중 이름에 ‘매운’ ‘핫’ ‘스파이시’가 들어간 제품의 매출은 2023년 1분기 38.2%(전년 동기 대비), 2024년 1분기 26.5%로 각각 늘어났다.
재미를 끌어 모으는 사람들
도파밍 트렌드에 발맞춰 기업도 마케팅 기조로 어떻게 하면 ‘재미’를 전달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추세다. 특히 숏폼 콘텐츠를 활용한 마케팅은 필수로 자리 잡았다. 무신사는 유튜브 채널 ‘무신사TV’를 통해 쇼츠 영상을 선보여왔다. 직원들이 자신의 스타일링을 소개하는 ‘출근룩’은 대표 콘텐츠로 꼽힌다. 2023년 10월 제작된 ‘모델 뺨치는 무신사 직원의 올블랙 출근룩’은 조회수 400만 회 이상을 기록했을 정도다. 또 W컨셉은 작년 4월 휴대폰 케이스 기획전인 ‘하이칙스’에 숏폼 콘텐츠를 활용해 직전 행사보다 매출이 60% 증가했다.
유통업계에서도 재미에 방점을 둔 콘텐츠가 필수로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주기적으로 이벤트와 공간을 리뉴얼해 지속적으로 기대감까지 충족시켜줘야 한다. 더현대서울 지하 2층 팝업 매장의 월간 매출액은 20~30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백화점 패션 매장 평균(2~3억) 보다 약 10배 높은 수준이다. 오프라인 공간의 콘텐츠를 스트리밍 함으로써 해당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도파밍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필수 속성으로
현대인은 왜 ‘재미’에 빠지게 됐을까? 우선 재미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과거에는 유희를 추구하는 놀이에 대해서는 생산성이 없다고 치부하기 마련이었다. 놀이에 비해 과업을 통해 생산성을 올리는 행위를 높게 평가해왔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 일과 놀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유희와 과업을 양분하던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몇 년 전에 흥미로운 조사가 있었다. 입시 전문 교육업체인 진학사가 청년 4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직업 선택에 있어 재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밝힌 응답자 비율이 전체의 77.5%에 달했다. 소비는 물론이고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재미는 필수인 시대가 된 셈이다.
매체의 변화도 꼽을 수 있다. <재미의 본질>의 저자인 김선진 교수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글자로 생각을 전달하는 ‘문자언어’의 세계에서 미디어로 생각을 전달하는 ‘영상언어’의 세계로 발전하고 있다. 글로 이뤄진 문자언어의 시대에는 재미 요소가 즉각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단어와 문장에 은은하게 녹아들어 가 있다. 반면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영상언어의 시대에는 재미가 좀 더 빠르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모든 콘텐츠가 ‘기-승-전-재미’로 끝나야 하며 재미가 없으면 곧바로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린다. 따라서 보다 시각적이고, 본능적이며, 직관적이고, 강렬한 형태의 재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마케팅이 ‘자극’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소비자에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재미있게 접근할 것인가는 모든 브랜드가 고민해야 하는 의무가 됐다. 특히 스마트폰이 만들어낸 직관적이고 단순한 영상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알파세대는 무엇보다 재미를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도파밍이 미래 소비시장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강력한 키워드 중에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DIGGING > d-Iss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리올림픽 마케팅의 모든 것 (0) | 2024.07.10 |
---|---|
불확실성의 시대, 달라지는 소비 패턴 (0) | 2024.06.05 |
우리 곁에, 기후기술 (0) | 2024.03.22 |
소비를 바꾸는 시대경험 <세대욕망> (0) | 2024.03.07 |
가벼움에 끌리는 사람들 (1) | 2024.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