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찬은 / 매일경제 시티라이프 편집장. 여행 및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나의 음주술책>, <주말마다 나를 고쳐 씁니다>.
매장에서 플립플롭을 신은 채 산악자전거를 수리하는 CEO, 직원들이 카약을 타고 지점으로 출장을 가고 블랙프라이데이에 143개 전 매장 문을 닫아거는 회사. REI 직원들은 국립공원으로 하이킹을 가려는 손님에게 그 산의 온도와 환경에 맞는 캠핑 제품을 추천해준다. 그들 역시 아웃도어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고객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으면 직원부터 행복하게 만들 것. 대자연이 주는 힘을 믿을 것. REI의 철학이다. 2400만 팬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국 최대 아웃도어 장비 협동조합 REI
‘좀 더 저렴한, 고품질의 아웃도어 장비는 없을까?’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등산용품을 비싸게 수입해 쓰는 데 불만을 품은 23명의 미국 워싱턴 산악 동호회 친구들은 공동 출자를 통해 현지에서 얼음도끼를 싸게 사온다. 1938년 시애틀에 설립된 아웃도어 장비 협동조합 REI(Recreation Equipment Inc.)의 첫 발걸음이다.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미국인 짐 휘태커가 1호 직원으로(그는 이후 REI 초대 CEO를 역임했다), 지금도 REI 제품을 판매하는 직원들은 모두 아웃도어 전문가들이다.
REI 로고의 ‘Co.op’는 ‘Co-operative’의 줄임말이다. ‘협동조합’은 높은 매출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공동의 목표와 규약을 바탕으로 움직이면서는 자본주의의 액티브한 소비 구조를 따라가기가 때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약 18만 명의 조합원과 2400만 명의 회원을 보유 중인 REI는 미국 39개 주에서 179개의 소매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출은 약 27억 달러(약 3조 7700억 원, 2020년 기준)에 달하는 미국 최대 소매 협동조합이 됐다.
REI 팬덤의 이유로 흔히 멤버십과 철학을 꼽는다. 최초 30달러를 내면 연회비나 갱신, 추가 비용 없이 평생회원으로 가입되는데 매년 구매액의 10%가 페이백 된다. 한정판 장비를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데다 액티비티 활동과 장비 대여 시 할인해주고 Re/Supply를 통해 중고장비를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다. 또한 멤버십에 가입하면 협동조합의 대표와 이사회 후보 투표 자격이 부여되고, 회원권 금액 중 5달러가 재단을 통해 공익 자선단체에 기부된다. 이는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현대 소비자들에게 긍정적 정서를 부여해준다.
각종 멤버십 혜택과 함께 ‘공홈엔 없어도 REI엔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품군이 다양하다는 것도 장점이지만 2400만 명의 팬덤을 만든 것은 무엇보다 REI가 ‘제품 판매’라는 수세적인 마케팅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객의 여정을 들여다보고 맞춤형 제품을 추천하며 더 나아가 걸맞은 프로그램까지 추천해준다.
블랙프라이데이에 문 닫은 뒤 350% 성장
해마다 11월이 되면 대부분의 기업은 직원들을 보강하고 재고를 쌓아둔다. 대규모 쇼핑 세일 기간인 블랙프라이데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REI는 2015년 블랙프라이데이 당일 전국 143개 매장 문을 모두 닫아걸고 전 직원에게 유급 휴가를 줬다. 검은 배경화면엔 ‘We are not here’라는 글자만 적힌 채 온라인 주문 창도 닫혀 있었다. 고객들에겐 과소비 대신 야외 생활을, 직원들에겐 머리를 쥐어짜 당장 한 벌의 옷을 더 팔기보다는 야외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라는 일명 ‘#옵트아웃사이드(#OptOutside)’ 운동이다. 이후 #옵트아웃사이드에 대한 SNS 반응은 7000% 급증하고 매체에 67억 회나 소개되며 150개 기업이 옵트아웃사이드 캠페인에 동조했다.
이후 REI의 연 매출은 35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약 100만 명의 멤버십 가입 결과를 낳았고 입사지원서 역시 100% 급증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케팅 업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REI의 ‘옵트아웃사이드’가 보여준 것은 ‘역발상의 진정성’이 고객들에게 가닿으면 재무적으로도 큰 성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직원도 소비자이자 잠재적 고객이다. 제품과 브랜드를 다루는 직원이 행복하고 브랜드의 가치가 스며들 때 마케팅 효과 역시 커진다. 제품 판매에 멈추지 않고 고객의 아웃도어 활동까지 소비 전반의 경험을 세심히 보살펴주는 REI 직원들은 그들 자체가 존중받은 만큼 자연스럽게 고객을 존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충성도 있는 매출로 연결된다.
80년간 “야외로 나가는 게 잘 사는 삶”을 외치다
회사에 속한 직원들이 어떤 느낌을 받으며 일하는가. 기업의 온도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다. REI 6대 사장 제리 스트리츠크는 “우린 출장도 그냥 가지 않는다. 신제품 품평을 하기 위해 조슈아 트리로 놀러가고, 카약을 타고 캘리포니아 남부 매장에 가거나, 산악자전거를 타고 협곡을 넘기도 한다”라고 밝혔다. REI는 1992년부터 성전환 수술 보험처리 등 성소수자 관련 혜택을 제공하고 여성의 승진에도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CEO도 조합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직원들은 한 달에 두 번 야외활동을 위한 유급 휴가를 받고 자발적으로 팀을 이뤄 야외활동을 즐긴다. 용품 및 렌탈 할인은 물론 액티비티 기획안이 선정되면 지원금도 제공한다. 같은 아웃도어지만 한국 MZ들이 그토록 혐오한다는 부장님발 ‘주말 체육대회’나 ‘등반 워크숍’과는 거리가 멀다.
REI 홈페이지에 적힌 글을 보자.
‘우리는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속에서 최고의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때문에 저희의 목적은 여러분의 아웃도어에 대한 생애 애정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We believe that it’s in the wild, untamed and natural places that we find our best selves,
so our purpose is to awaken a lifelong love of the outdoors, for all.’
REI는 단순히 많은 물건을 파는 것을 넘어서 ‘가능한 많은 이들을 자연으로 내보내겠다’고 80년 이상 말해왔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전문가가 장비 사용 노하우를 가르쳐주며 매장의 커뮤니티 라운지에선 난이도와 가격, 소요시간을 적어둔 채 카야킹과 빙벽 등반 참가자를 모집한다. 사람들을 컴퓨터 앞 대신 야외로 내몰고 적극적인 아웃도어 활동으로 유인하는 REI의 경험 비즈니스는 거대 온라인 유통기업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된다. 돈보다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아웃도어의 경험을 각인시키며 가치소비를 원하는 소비자들과 나란히 걷고 때론 함께 땀 흘리는 것.
REI가 평범한 소매 협동조합을 벗어나 팬덤을 만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아웃도어 활동에 대한 수십 년간의 애정’ 때문이다. 꾸준히 아웃도어 활동을 추천하고 그 가치와 경험을 팔며, 직원들에게도 장려하고, 중고 플랫폼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 것에 돈을 쓰는’ 현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야외로 나가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은 REI는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회사를 선택하고 집중하는 현대의 소비자를 만나 여전히 순항 중이다. 급진적이지 않게, 대자연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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