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지연 / 중앙일보 이노베이션랩 기자
지난 6일, 미국 LA의 한 슈퍼마켓이 ‘2024 겨울 의류 컬렉션’을 출시했다. 후드가 달린 셔츠, 크루넥 티셔츠, 스웨트 팬츠와 양말, 모자 그리고 가방 등 LA의 힙스터들이 마켓 나들이를 갈 때 입을만한 다소 심심한 의류와 액세서리들이다. 슈퍼마켓에서 웬 의류 컬렉션인가 싶지만, 티셔츠 한구석에 적힌 ‘에레혼(EREWHON)’이라는 브랜드 이름을 보면 납득이 된다. 단순한 슈퍼마켓이 아니다. 에레혼은 현재 패션·라이프스타일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 중 하나다.
어디에도 없는 슈퍼마켓
현재 미 서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10개의 지점을 운영하는 에레혼은 알고 보면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66년, 당시 범람한 히피 문화를 타고 지금의 위치와 정반대인 미 동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시작했다. 일본인 미치오 쿠시와 아벨린 쿠시가 연 유기농 천연 식품 매장이 그 시작. 낯선 단어인 에레혼은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소설에 등장한 지명이다.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노웨어(Nowhere)’를 재배열한 단어로, 식료품점으로는 다소 철학적이다.
이후 히피 문화의 하강과 함께 부침을 겪던 에레혼은 2011년 토니 앤토시와 조세핀 앤토시가 매장을 인수한 뒤 현재의 고급 대형마트로 탈바꿈한다. 타깃은 건강한 유기농 식단을 선호하는 LA의 상류층. 유전자 변형이 없는 농산물, 로컬의 건강한 식재료, 자연방목 육류 등을 폭넓게 취급하며 세를 불려 갔다. 이후 LA 셀럽들이 자주 찾는 마켓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10개 매장으로 확대, 지난 한 해 에레혼은 1억7140만 달러(2,45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경제지 ‘패스트컴퍼니’는 에레혼을 ‘2024년 가장 혁신적인 소매 업체’ 중 하나로 선정했다.
미 서부에만 있는 로컬 슈퍼마켓의 이름이 대중에 오르내리게 된 계기는 지난해 12월 발표된 프랑스 패션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2024 프리폴(Pre-fall) 컬렉션’이다. 할리우드 사인을 배경으로 레깅스에 후디를 입은 다리 긴 모델들은 한 손에 텀블러, 다른 손에는 짐백과 함께 에레혼이라는 생소한 로고가 박힌 쇼핑백 혹은 테이크아웃 음료잔을 들고 런웨이를 활보했다. 비싼 유기농 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온 힙스터 그 자체를 연출했던 발렌시아가의 패션쇼는 한 지역 슈퍼마켓을 단숨에 LA 셀럽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전국구 브랜드로 격상시켰다.
럭셔리 오가닉 마켓 에레혼과 패션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협업으로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쇼핑백, 음료잔을 들고 워킹했다. 에레혼x발렌시아가 스무디도 출시했는데 사과, 레몬, 생강 외에도 차콜 파우더를 넣어 발렌시아가의 대표 컬러인 블랙 음료로 주목받았다.
생수 3만원, 스무디 2만원
LA 라이프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에레혼은 파고들수록 재미있는 장소다. 우선 상식적 선을 아득히 뛰어넘은 가격이 눈에 띈다. 에레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무디 한 잔의 가격은 2만5000원(18달러). 아무리 각종 유기농 과일과 채소는 물론 단백질과 콜라겐 등의 영양 성분을 파우더 옵션으로 추가할 수 있으며, 바다이끼 젤이나 코코넛 발효유(케피어) 등 희소한 건강 재료도 원하는 만큼 믹스할 수 있다 해도 과한 가격이다. 물론 여기에는 헤일리 비버 같은 헐리우드 금수저 셀럽의 비법 레시피라는 한끗 다른 킥도 추가된다. 비버의 ‘스트로베리 글레이즈 스킨 스무디’는 한 달에 4만 잔 이상이 팔린다고 한다.
스무디뿐일까. 산소를 넣은 생수 한 병은 3만5000원(25달러). 치킨 윙 대신 콜리플라워를 구운 비건 버펄로 콜리플라워는 400g(1파운드)에 2만8000원(20달러)에 달한다. 샐러드에 스무디 한 잔, 물 한 병을 놓고 단출한 식사를 즐겨도 10만원을 훌쩍 넘긴다는 얘기다. 물론 비싼 만큼 에레혼이 보여주는 모든 것은 고급스럽기 그지없다. 벨기에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 내부는 마치 명품 브랜드의 매장 같은 쾌적함과 개방감을 자랑한다. 완벽하게 각을 맞춰 도열한 사과와 오렌지, 피망 따위는 농장에서 갓 배달된 신선함 그 이상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투명한 유리병에 곱게 포장된 각종 소스와 양념들은 마치 미술관에 진열된 오브제마냥 도도하다.
식료품은 새로운 사치
흔히 에레혼의 인기는 디토(Ditto) 소비로 해석되곤 한다. 셀럽들이 실제로 쇼핑을 하는 장소인 만큼 그들을 따라 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얘기다. 일상적 장보기를 위해서 들르기보다, 스무디 한 잔을 산 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 올릴 인증샷을 촬영하기 위해 에레혼에 가는 이들도 분명 있다. 힙한 카페를 찾듯 연인들의 나들이 혹은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한다. 미 뉴욕타임스는 이런 에레혼을 두고 “LA에서 가장 핫한 만남의 장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만 에레혼의 부상을 디토 소비로만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비싸고 반짝이는 것들을 선망하고 유명세를 따라 소비하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던 현상은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그것이 명품 가방이나 주얼리가 아니라 유기농 주스와 자연방목 치즈 따위의 식료품이라는 점이다. 고급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고급 식료품이 주목받고 있다.
올해 초 컨설팅 업체 맥켄지앤드컴퍼니가 발표한 ‘미국 소비자 심리’ 보고서에 따르면 MZ세대가 ‘올해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싶다’고 밝힌 품목은 다름 아닌 식료품이었다. 밀레니얼 세대의 41%, Z세대의 38%가 여행·레스토랑·의류·미용 등으로 구성된 13개의 품목 중 식료품을 가장 높은 순위로 꼽은 것이다.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디자이너 의류를 사들이는 대신 좋은 식료품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하겠다는 의향이다.
먹고 경험하는 것이 곧 나
이는 단지 건강 지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들이 정의하는 럭셔리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요란한 퍼를 두르고,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달고 다니는 대신 간단한 요가복 차림에 짐백을 메고, 에레혼의 스무디 한 잔을 들고 다니는 삶. 단순히 입거나 걸치는 것에서만 최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최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욕망. 요즘 젊은 세대들이 추구하는 웰니스, 진짜 럭셔리다.
사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스무디 한 잔으로 건강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꽤 합리적인 거래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립스틱을 사는 대신 기꺼이 B-corp 마크가 박힌 유기농 식재료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리고 이 같은 소비 패턴은 비싼 시계나 자동차 같은 고가 물건을 소유하려고 했던 과거와 대비된다.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함과 여유, 세련됨, 긍정적 감정까지도 포괄하는 삶의 방식, 삶의 지향 그 자체를 원하고 있다.
점점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없어지는 시대, 에레혼은 앞으로 브랜드가 어떤 지점을 파고들어야 할지 중요한 힌트를 던진다. 단순히 고급스럽고 멋진 물건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 근사한 생활 방식, 멋진 삶의 지향을 내세워야 한다. 어디에도 없었던 슈퍼마켓이 소비자의 시간을 점유한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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