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가 놀이가 된 현상
글 이우성 / 시인, 미남컴퍼니 대표.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GQ> <Dazed&Confused> <ARENA Homme+>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문화 전반에 대해 글을 쓰며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든다.
플렉스. 잘난 척. 허세 부리는 거. 우쭐거리며 과시하는 거. 미국 래퍼들이 시작했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차고 목걸이도 주렁주렁 걸치고, 무거워서 못 움직일 것 같은데, 어깨를 올리고 젖히며 과하게 흥얼거리는 거. 크게 보이려고. ‘있어 보이는’ 척하는 거. 그중 누군가는 정말 ‘있고’ 누군가는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거. SNS라는 게 생기면서 소위 물 건너왔다.
한국에선 염따(래퍼라고 함. 개인적으로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음. 플렉스 때문에 알게 됐음.) 등 연예인들이 SNS에 “~해버렸지 뭐야” 같은 말투를 곁들이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뭐 그전에 누군가 또 했을 거 같기는 한데, 그것까진 모르겠다. 아, 도끼가 먼저 했다. 집 자랑 차 자랑하는 거, 그게 다 플렉스다. 아무튼, 대략 이런 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천오백만 원짜리 롤렉스를 사버렸지 뭐야” “고장 낸 친구 벤틀리를 고쳐주려다가 그냥 내가 탈 벤틀리를 사버렸지 뭐야.” 그런데 플렉스(flex)의 원래 뜻은, 음, 사전 찾아보면 나오니까 각자 찾아보면 되겠다. (“오, 나는 심지어 단어로 플렉스를 해버렸지 뭐야~”).
그런데 플렉스 현상에서 신기한 게 뭐냐면, 플렉스하는 놈들이 별로 밉지 않다는 거다.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보통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인데 이 경우엔 그렇지가 않다는 거지. 봐줄 만은 하달까. 겸손이 미덕인 시대를 지나와서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하지만 겸손은 영원히 미덕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루하게 느껴진다. 플렉스 하는 사람들을 보며 재미있어하고 혹시 열광한다면 그들이 뭘 사거나 과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별로 아니 전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와, 저 자식은 뭐 저렇게 대놓고 자랑을 하고 그래?’라고 놀라면서 ‘와, 진짜 개념 없이 솔직하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솔직하게 살아도 되나?’ ‘자랑 좀 하고 살아도 되나?’ ‘겸손 떠느라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사느니, 그냥 막살자’ 이런 감정. 그러니까 결론은, 사회적 억압을 플렉스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이 놀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플렉스, 그거 뭐 별거 아니거든.
SNS에서 ‘#플렉스’를 검색하면 (일단 무슨 클럽(club) 관련 게시물들이 나오는데 이건 패스) 다양한 플렉스를 볼 수 있다. 명품 가방을 샀다는 플렉스도 있고, 모처럼 휴일에 카페 가서 커피 마셨다는 플렉스도 있고, 비싼 해산물을 원 없이 먹었다는 플렉스도 있다. 별거 아니다, 플렉스. 저 위에 내가 적은 플렉스의 의미는 지금으로선 맞기도 하지만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소확행이랑 동의어일 수도 있고, 만족하며 드러내고 사는 삶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2~3년 사이 ‘꼰대’라는 단어가 새삼 주목받았다.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나는 플렉스 현상과도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잔소리가 듣기는 싫어도 ‘듣기 싫으니까 그만 하세요’라고 말하는 건 버릇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건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그들을 ‘꼰대’라는 단어로 규정하면서 묘한 희열을 느낀다.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좀 내버려 둬’라는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생기는 현상 중 하나가 플렉스 아닐까. 사실 플렉스 자체는 별로 도덕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어떤 플렉스는 과소비를 조장하기도 하고, 허영심을 부추기기도 하지만(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꼰대!) 플렉스의 본질은 욕망을 따르고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이게 스스로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겠냐고 나는 말하고 싶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플렉스 현상에서도 일반인들의 ‘연예인화’가 두드러진다. ‘연예인화’라는 단어가 촌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일반인과 연예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건 SNS가 등장한 이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플렉스 현상은 새삼 그걸 확인하게 만든다. 그저 시청하고 감상하던 일반인들이 적극적으로 흉내 내고 주도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연예인만 협찬을 받았지만, 지금은 일반인도 협찬을 받는다. 예전엔 연예인만 화보를 찍었지만, 지금은 일반인도 조명이 잘 갖춰진 스튜디오에서 화보를 찍는다. 심지어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일부 일반인들은 연예인 못지않게 인기가 많다.
일반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연예인들 흉내 내며 플렉스를 한 게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어느 정도 조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패션, 뷰티 브랜드가 연예인 마케팅의 대안을 일반인 마케팅에서 찾은 것도 주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플렉스라는 걸,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보고 싶지가 않다.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일반인들이 대리만족에 머무르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이다. ‘직접 만족’의 시대, 그걸 플렉스가 보여준다.
그래서 뭐 별 의미 없지만 나의 바람은 이렇다. 두세 달 택시비를 모으고 술값도 아껴서 갖고 싶은 가방을 샀다고 치자. 그게 된장남 소리를 들을 일인가? 전혀 아니다. 축하받을 일 아닌가? 가방을 볼 때마다 그 가방을 사기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뿌듯해지지 않나? 단순히 들고 다니기 위해 가방을 사는 게 아니다. 그걸 얻기 위해 노력한 순간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사기도 한다. 그러니까 눈치 볼 이유가 없다. 그냥 플렉스 해버리는 거지. 이미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도덕책 같은 댓글 다는 꼰대가 있다면 계몽해버리자. “야, 너도 플렉스 할 수 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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