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를 고민하는 소비자들
글 조수영 / CJ E&M에서 PD로 일했다. 스웨덴 룬드대학교에서 환경학, 지속가능과학 전공으로 석사를 마쳤다. 현재 마켓컬리 브랜딩전략팀에서 지속가능성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파격세일, 마감세일, 지금 안 사면 손해.
손 닿을 곳에 도배된 ‘안 사면 바보’라는 유혹의 손길들. 어쩌면 우리는 소비하기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소비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소비는 ‘부끄러움’이며 ‘죄책감’인 시대가 오고 있다.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뤼그스캄(flygskam), 그 뒤를 잇는 숍스캄(Köpskam)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스웨덴 단어 skam은 영어로 shame, 즉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뜻한다. 플뤼그스캄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엄청난 비행기 탑승의 부끄러움을, 숍스캄은 구매와 쇼핑에 대한 부끄러움을 의미한다. 비행기 대신 기차로 여행하는 행위에 대한 자부심을 뜻하는 톡쉬크리트(Tågskryt, train brag)와 같은 단어도 생겨났다.
2019년 플뤼그스캄이라는 단어가 확산되며 실제로 2019년 1월에서 4월까지 스웨덴의 비행기 이용 승객 수가 전년 대비 8% 감소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는 어떠한 인지나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뤼그스캄은 개개인의 행동 변화를 넘어 기업과 단체의 방향성 전환을 이뤄내기도 한다.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해 11월 독일 뮌헨에서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며 화상회의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수많은 과학자와 대학교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타면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상당하다고 판단되어 주최 측에서 직접 시도한 것이다.
패션잡지 보그 이탈리아는 화보 촬영을 하며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에너지 낭비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자 2020년 1월호를 사진이 아닌 삽화로 대체했다.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는 콘서트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새로운 앨범을 홍보하는 투어 공연을 2~3년간 잠정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다양한 시도는 세계 곳곳에서 시작되고, 지속되고 있다.
2019년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플뤼그스캄에 이어 소비에 대한 부끄러움, 숍스캄이 떠오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는 행위뿐 아니라 새로운 물건을 사는 행위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소비는 스트레스를 푸는 즐거움으로, 혹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미덕으로 여겨지곤 했다. 따라서 소비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고민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소비를 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돈을 아끼는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소비를 환경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의 소비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을 사용하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청바지 하나를 산다는 건 그 청바지를 만들기 위해 7,500ℓ의 물을 쓰고 버리는 일이며, 그 청바지를 세척하며 수천 개의 미세플라스틱 섬유를 바다로 배출하는 일이다. 또, 제조 공장을 밝히는 수백 개의 전구와 기계를 돌리는 데 드는 전기, 청바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직물과 만들어진 제품을 옮기는 운송에너지까지. 이토록 다양한 종류의 자원을 사용하며 얻게 되는 결과물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행동하기로 한 소비자들은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뿌듯함’보다는 ‘참여하지 않을 때의 부끄러움’을 더 크게 느낀다.
이러한 사람들의 의지와 행동변화가 아직 한국까지 도래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결코 느리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무엇이든 조금 늦게 도착해도 더 빨리 퍼지고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이 한국인이며,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그렇기에 기업과 마케팅 시장은 아직 한국 사회에 숍스캄이 주류 문화로 정착하지 않았다고 미뤄둘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고민해야 한다.
2019년 네덜란드 항공사 KLM은 파타고니아의 <Don’t buy this jacket>을 떠올리게 하는 <Fly Responsibly>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 캠페인에서 KLM은 비행기표를 사기 전에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한다. 영국 버거킹은 <Melt Down>이라는 캠페인을 통해 주니어 밀 메뉴에 포함되어 무료로 제공되던 장난감을 없애고,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구식 플라스틱 장난감을 가져오면 그것을 모아 녹여서 재활용한다.
이러한 캠페인이 진정성 있는 시도인지, 한시적으로 유지될 그린워싱(Green washing, 기업이 실제보다 환경 보호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행동)에 불과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캠페인을 통해 KLM은 항공업의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한 최초의 항공사가 됐고, 버거킹은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들이 진행했던 프로모션의 문제점에 대해 고찰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했다.
이미 탄소배출의 부끄러움을 알아버린(혹은 느껴버린) 소비자들은 더 이상 일회성 캠페인이나 이벤트식 광고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더는 새 옷을 사지 않고 중고가게를 찾는 북유럽 사람들처럼, 새 물건을 살 바에야 만들어 쓰겠다는 독일 사람들처럼, 스스로 행동하며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만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전략과 방향성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우리가 파는 물건을 사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도 아니다. 다만 기업은 이러한 흐름이 주류가 될 가능성을 인지하고 스스로의 산업이 가진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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