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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d-Culture

크리에이티브에 진심을 담으면

 

글 콘텐츠5팀 송서율 CⓔM

 


 

칸과의 첫 인연은 YLC(Young Lions Competition)였다. 칸 라이언즈는 전 세계 30세 이하 광고인을 대상으로 YLC라는 크리에이티브 컴피티션을 주최한다. 나는 한국 대표로 두 번 선발됐는데, 그중 한 번은 본선에서 골드를 수상해 칸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행사장 구석에서 제안서를 만들고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PT와 Q&A까지 해냈던 시간. 모든 과정이 서툴렀지만 칸은 그 치기 어린 당돌함을 기꺼이 받아줬다.

 

2023, 2024년도의 칸 라이언즈 현장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마지막 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치 쌍방이라고 믿었던 연애에서 끝을 선고 받는 기분이랄까. 컴피티션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다는 기대, 그러나 일정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있기에 더 짙게 밀려오는 아쉬움. 그 두 감정을 안고 나는 다시 한번 칸에서의 일주일을 시작했다.

 

결국은, 사람

 

오프닝 세미나는 ‘올해의 크리에이티브 마케터’로 선정된 애플이 맡았다. 주제는 <Human After All>. AI 시대에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진부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메시지를 가장 애플스럽게 보여준 캠페인은 <Heartstrings>다. 에어팟 프로2의 보청기 기능을 알리는 캠페인으로, 보청기를 꺼리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됐다. 이 기능을 구현하기까지 약 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애플은 수익성보다 ‘모든 이를 위한 접근성(Accessibility)’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광고 역시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시작부터 무려 40초간 정적이 흐르는 이 광고는 데이터도, 알고리즘도 추천하지 않은 방식이다. 하지만 애플은 계산보다 사람의 직관과 감정을 믿었다. 그 결과 <Heartstrings>는 공개 일주일 만에 유튜브에서 5천만 뷰를 기록했고, 기술이 사람을 향할 때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가 브랜드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다. 기술의 시대에도 결국 사람에 대한 진정성이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이어야 한다.

 

‘척’은 통하지 않는 곳

영 라이언즈일 때는 컴피티션 일정만으로도 일주일이 빠듯하다. 그때 가장 보고 싶었던 세션은 단연 ‘라이브 저징(Live Judging)’이었다. 세미나와 수상작은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지만 그랑프리를 두고 각 대행사가 무대 위에서 쏟아내는 진심 어린 프레젠테이션은 오직 그 순간, 그 자리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Direct Lions 그랑프리를 포함해 최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AXA의 <Three Words> 캠페인은 브랜드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대답이었다. AXA는 기존 보험 약관 끝에 “and domestic violence(및 가정 폭력)”라는 세 단어를 추가해 가정 폭력 피해자가 즉시 이주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브랜드가 실제 도움이 되는 변화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변화는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캠페인이었다.

 

출처 lovethework.com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는 케이스 필름을 봤을 때보다 훨씬 깊은 감동을 느꼈다. 많은 대행사들이 캠페인 수혜자와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나는 그 방식에 오히려 반감이 들기도 했다. 트랜스젠더용 제품을 소개하며 트랜스젠더를 직접 무대에 세우거나 지적 장애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쇼를 선보인 패션 브랜드의 프레젠테이션은 보여주기 위한 연출처럼 느껴졌다. 그에 반해 <Three Words>는 프레젠테이션에서도 피해자의 익명성과 안전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Q&A 답변을 위해 조심스럽게 고른 단어마다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견뎠을 무게, 그에 대한 브랜드와 대행사의 깊은 고민이 전해졌다.

 

 

한편, Creative Data Lions 그랑프리를 수상한 <Efficient Way to Pay> 캠페인은 논란 끝에 수상이 취소됐다. 브라질 정부와 가전업체가 협력해 에너지 효율이 높은 가전을 선지급하고, 절감된 전기 요금으로 할부금을 갚는 구조는 겉보기엔 완벽했다. 하지만 케이스 필름 속 CNN 앵커와 지역 의원 장면이 AI로 조작된 사실이 드러났다. 존재하지도 않은 뉴스 보도와 발언을 실제 성과처럼 꾸며 심사위원들을 속인 것. 칸 조직위원회는 이 캠페인이 심사의 투명성과 진정성을 훼손했다고 판단해 수상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기술이 사람의 감정을 ‘속이기 위해’ 쓰이는 순간, 그 크리에이티브는 더 이상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Efficient Way to Pay> 케이스 필름에서 AI로 조작한 장면들 / 출처 lovethework.com

 

진심의 힘을 빌어

3년 동안 칸의 주제와 수상작은 매년 달라졌지만, 변화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서툴러도 진심은 통한다는 것. 기획서를 쓰는 24시간 동안 부족할까 봐 졸였던 마음, 손짓과 몸짓으로라도 기획 의도를 분명하게 전하고 싶었던 간절함. 영 라이언즈의 시간은 칸에 대한 내 진심이었다. 평소 용기가 없어 망설였던 선배님들께도 진심의 힘을 빌어 다가갔고, 그는 해를 거듭해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이 됐다. 칸은 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크리에이티브를 대하는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그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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