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혜준 / 푸드 콘텐츠 디렉터, ‘김혜준컴퍼니’ 대표, ‘밍글스’, ‘톡톡’, ‘식부관’ 브랜딩, 저서 <작은 빵집이 맛있다>
2004년 여름, 잠시 캘리포니아에서 어학 연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꾸쉬’라는 이름의 퓨전 레스토랑에서 불고기 비빔밥을 먹고 근처 미세스 필즈 쿠키숍에서 아이스크림 쿠키 샌드위치를 디저트로 즐겼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마카다미아 쿠키 2개 사이에 튼실하게 퍼준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0.99달러라니! 나는 그렇게 벤앤제리스와의 황홀한 인연을 시작했다.
벤앤제리스는 동갑내기 친구인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가 1978년에 설립한 아이스크림 브랜드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 5달러짜리 아이스크림 제조 교육 과정을 수강하고 받은 1만 2천 달러의 투자금을 가지고 낡은 주유소를 개조해 첫 매장을 열었다. 27살 다운 패기였다.
그렇게 미국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아이스크림 사업은 현재 40개가 넘는 나라에서 소비자를 만나고 있다. 벤과 제리는 매장 오픈 1주년이던 1979년, 고객 감사 차원에서 프리콘데이를 개최했다. 하루 종일 모든 고객에게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무료로 제공하는 이 행사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매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약점을 강점으로, 현명한 차별화 전략
초콜릿 퍼지 브라우니와 초콜릿칩 쿠키 반죽이 듬뿍 들어간 쫀득한 식감의 ‘하프베이크드’, 고급스러운 바닐라 베이스에 체리와 초콜릿칩이 조화롭게 섞인 ‘체리 가르시아’는 벤앤제리스의 대표 메뉴로 꼽힌다. 참고로 체리 가르시아는 벤 코언이 좋아하는 미국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의 보컬 제리 가르시아의 사망을 추모하고자 만든 메뉴다.
한때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시절이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모두 장만한 후 나는 곧바로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 쿡북을 펼쳤다. 다양한 과일이 한 움큼 들어가고 치즈케이크 덩어리가 양껏 박힌 아이스크림은 묵직한 행복을 느끼게 해줬다. 그렇게 몇 번 만들어보니 벤앤제리스는 엄마가 만들어준 아이스크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를 큼직하게 넣는 구성이나 다양한 맛을 적극적으로 혼합하는 방식은 경쟁 구도에 있는 하겐다즈와 확연히 차별화된 전략인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벤 코언의 악성 후각상실증 덕분(?)이었다. 순수한 하나의 맛을 추구하기보다는 다양한 맛과 식감으로 재미를 줘 재료 본연의 향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약점을 극복한 것!
브랜드 행동주의의 좋은 예
재미있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벤앤제리스, 그러나 그들의 가치관과 방향성은 제법 진지하고 힘이 있다. 현재 벤앤제리스는 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의 자회사로 운영되고 있는데, 2000년 매각 당시 기존의 회사 운영 방침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과연 그들은 어떤 미래를 추구하기에 이토록 진심일까?
벤앤제리스의 공동창업자인 벤과 제리는 ‘보살피는 자본주의(Caring Capitalism)’라는 경영 철학 아래 적극적인 사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성장호르몬제를 투여 받은 젖소의 우유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성장호르몬제 투여 금지 법제화 요구에 앞장서는 식이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매장을 철수해 화제가 됐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판매 행위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어긋난다며, 막대한 경제적 피해와 지난한 소송을 감내하고선 35년간 이어온 사업을 중단했다. 벤 코언이 미국 국회에서 끌려나가는 모습 또한 SNS에서 오래 회자됐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자지구에 구호 물품 반입을 금지한 이스라엘의 봉쇄령을 공개 비판했다.
이렇듯 벤앤제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브랜드 행동주의를 강조하고 실천하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한때 정치권에서도 목소리를 냈는데, 2016년 대선 당시 진보 성향의 민주당 후보인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며 ‘Bernie’s Yearning(버니의 열망)’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출시했다. 윗부분의 초콜릿은 상위 1%를, 아래 민트 아이스크림은 하위 99%를 상징해 초콜릿을 깨뜨려 민트와 혼합해 먹도록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2019년 9월에는 흑인과 소수인종 모두에게 평등한 형사법 개혁을 요구하면서 ‘Justice Remix’d’라는 메뉴를 출시하기도 했다.
한계를 뛰어넘는 성공 방식
한국 시장에서 벤앤제리스는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0년대 초반 강남역에 첫 매장을 오픈했으나 유통 문제에 부딪혀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재진출을 시도했지만 환경, 인권, 상생 등의 브랜드 가치를 조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20년 창업한 멀티 프랜차이즈 빌더 ‘세컨드 유레카(Second Eureka)’를 만나 4년 만에 200개의 점포를 전국적으로 퍼트리는 데 성공했다. 배달 어플 입점, 팝업 스토어 운영, 샵인샵 등 판매 방식을 다양하고 공격적으로 운영한 전략이 승부수였다. 그 덕분에 코로나 시대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용감한 행동이다. 시대의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에 융통성을 발휘하는 벤앤제리스. 세대를 뛰어넘어 꾸준하게 사랑 받는 ‘올타임 레전드’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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