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지연 / 중앙일보 이노베이션랩 기자, 저서 <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
식을 줄 모르는 ‘백꾸(가방 꾸미기)’의 인기 속에 최근 눈에 띄는 캐릭터 하나가 있다. 무성한 털 사이로 아홉 개의 톱니 모양 이빨을 드러내며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인형, 바로 ‘라부부(LABUBU)’다.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작은 인형 하나가 뭐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알고 보면 이 인형 몸값이 보통이 아니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첫 라부부 경매에서 낙찰된 금액은 108만 위안(약 2억 600만원). 라부부 초기 모델이자 전 세계에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프리미엄을 생각해도 꽤 큰 금액이다.
라부부, 플라스틱 마오타이가 되다
라부부는 중국 완구 기업 팝마트(POP MART)의 대표 상품이다. 이들은 디자이너 토이 브랜드 ‘몬스터즈’ 시리즈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중 한 캐릭터가 라부부다. 홍콩 출신 아트 토이 작가 룽카싱이 2015년 선보인 이 털북숭이 인형은 북유럽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숲의 요청이다. 팝마트는 지난 2019년 이 캐릭터의 지적재산권(IP)을 사들여 판매를 시작했다.
라부부가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23년이다. 블랙핑크의 리사가 라부부 키링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리한나, 킴 카다시안, 두아 리파 등의 셀럽들이 차례로 핸드백에 라부부 키링을 달고 등장하면서 지금 가장 뜨거운 패션 아이템이 됐다.
라부부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오프라인 팝마트 매장에서는 물론 온라인에서도 연일 품절 사태를 빚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만이 아니라 태국·일본·한국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달에는 국내 팝마트 매장에 라부부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과열과 혼잡을 우려해 일시 판매 중단을 결정했을 정도다. 실제로 팝마트 코리아 홈페이지에서 현재 라부부는 품절로 구할 수 없는 상태다. 인기는 곧 매출로 이어졌다. 팝마트의 지난해 매출은 130억 4000만 위안(약 2조 48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06.9% 증가했다.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자 라부부의 몸값도 뛰기 시작했다.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라부부 거래액은 전월 대비 121%,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711% 급증했다. 정가 12만원대 라부부 인형이 최고 130만원에 거래되는 기록도 세웠다.
리셀가가 치솟자 라부부 수입 열기는 투자 수요로 확장했고 라부부는 단순한 인형을 넘어 희소가치 있는 ‘아트 토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생산량에 제한을 두는 방식으로 투자 가치를 높이는 중국의 명주 ‘마오타이’에 빗대 ‘플라스틱 마오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희소성으로 승부하는 아트 토이
물론 폭발적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공급량만이 라부부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팝마트의 독특한 판매 방식이 빛을 발한다. 바로 블라인드 박스(랜덤 박스) 방식이다. 팝마트는 창립 이후 모든 피규어를 계속해서 블라인드 박스 형태로 판매하고 있다. 소비자는 포장지를 열기 전까지 어떤 디자인의 피규어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덕분에 박스를 개봉하는 순간의 기대감과 긴장감이 상당하다. 사람들이 팝마트 제품을 구매한 뒤 올리는 언박싱 영상은 팝마트를 즐기는 또 다른 콘텐츠다. 실제로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에는 라부부 언박싱 영상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인형 뽑기’를 떠올리게 한다. 인형의 소유보다 마음에 드는 인형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재미라는 점에서다. 또한 이런 불확실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하는 피규어가 나올 때까지 반복 구매하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자연스럽게 추가 수요를 끌어올린다. 쉽게 손에 넣지 못하게 함으로써 희소가치를 만드는 방식이다. 영국 BBC는 이런 팝마트의 판매 방식을 두고 “수집가에게 일종의 도박”이라며 “랜덤박스 방식이 젊은 세대의 수집 욕구와 결합해 인기를 끌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팝마트의 판매 방식은 사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더 적합한 방식이다. 중국 현지 팝마트의 블라인드 박스 가격은 낮게는 1만원대부터 시작한다. 지갑이 얇아 소비에 신중해지는 시기, 비교적 적은 돈으로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운이 좋으면 투자 금액의 몇 배나 되는 희소한 한정판(시크릿 캐릭터)을 뽑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은 팝마트 피규어 구매를 부추긴다.
감정적 지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높거나 경제 성장이 둔화한 불황기에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어른들이 등장하곤 한다. 이른바 ‘키덜트’ 족이다. 동심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소비 지출을 늘리고 인형을 수집하거나 장난감 구매에 열을 올린다. 유년기에 향유하던 문화를 통해 노스탤지어를 충족하고 안정감과 위로를 받으려는 현상이다.
그런데 라부부 등 팝마트 피규어 열풍에는 이런 캐릭터를 향한 감성적 지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하다. ‘매력 있다’, ‘귀엽다’ 정도의 감상 외에는 캐릭터에서 어떤 서사가 읽히지 않는 탓이다. 라부부 역시 북유럽 신화에서 영감 받았다는 짧은 설명 외에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 그야말로 텅 비어있는 세계관이다. 오로지 귀여우니까 가지고 싶다는 욕망의 투사라는 점에서 고가의 패션 아이템이나 한정판 수집품에 가깝다.
바이럴 시대의 전략
세계관 쌓기 대신 팝마트가 힘을 쏟는 부분은 캐릭터의 변주다. 팝마트는 같은 캐릭터도 각 나라의 문화에 맞춰 한정판으로 출시하거나 타 브랜드 및 셀럽과의 협업에 능하다. 싱가포르에서는 머라이언 라부부를, 일본에서는 마네키네코(복을 부르는 고양이) 라부부를 출시하는 식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정판 마케팅과 결합해 구매욕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된다. 반스나 코카콜라, 유니클로 등 타깃 고객에 맞춘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캐릭터의 서사에 새로움을 불어넣기도 한다.
어쩌면 팝마트는 전통적 캐릭터 산업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요즘 소비자들의 낙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쌓아 올리고 캐릭터 간의 관계성을 만드는 식으로 IP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밈(Meme)처럼 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확산한다는 점이 그렇다.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당장 재미있어서 소비하고, 지금 화제가 되니까 나도 덩달아 참여하고 싶어진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해지기, 요즘 같은 바이럴의 시대에 팝마트의 가장 영민한 전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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