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김민성 / 생활변화관측소 연구원. 문화인류학적 관점으로 변화와 맥락을 해석하고 있으며, 각종 매거진을 통해 트렌드의 변화를 발신하고 있다.
‘감정적이다’라는 말은 오랫동안 좋은 표현이 아니었다.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의미였고, 직장에서 눈물을 보이면 프로답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감정은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잘 숨기는 사람이 어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람들은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소셜 빅데이터를 통해 '감정 관리’와 ‘감정 이해’의 흐름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인다. 2022년 초에는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관리’하는 것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데 2023년 이후 그 추세가 역전하며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관리’와 ‘이해’는 어떻게 다른가? “왜 그런지 알았으니 참자”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이해에, “왜 그런지 알았으니 조율하자”라고 행동하는 태도는 관리에 가깝다.
MBTI 이후의 자기 설명법
MBTI의 유행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저는 INFP예요"라는 말 한 마디로 내 취향의 맥락을 전달할 수 있다. MBTI의 진짜 유산은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확산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MBTI 너머의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
MBTI는 HSP(과민성 성향)나 애착 유형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람들은 감정 관리의 일환으로 HSP 테스트를 하며 자신의 민감도를 확인하고, AI에 CBT(인지행동치료) 프롬프트를 입력해 사고 패턴을 점검한다. 스트레스는 도파민,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 용어로 세분화되면서 이를 다스리는 일상 속 루틴을 설계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라고 타인의 기분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예민하다’고 치부하지 않고 ‘기질’로 이해한다. 연인과의 갈등을 성격 문제보다 애착 유형의 차이로 해석하고, 원인 모를 피로는 의지 부족이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 과다로 설명한다.
이 언어들은 단순한 진단이 아니다. 자책을 멈추게 하는 구조다. 설명할 수 있으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산책을 하고, 수면을 관리하고, 휴식을 설계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다루는 방식으로 이동한다.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늘어날수록 세상과의 괴리를 해석할 수 있는 틀도 함께 늘어난다. 이는 감정의 약화가 아니라 정교화에 가깝다.
AI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
자기 이해 및 관리의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화 상대의 이동이다. 대화하는 상황에서 언급되는 대상 키워드를 연도별로 보면 주목할 만한 대상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AI다.

2022년 상위 키워드는 친구, 엄마, 부모, 남자친구였다. 2023년 들어 순위권 밖에 있던 AI가 처음 10위권에 등장했고 2024년에는 ‘가족’을 앞질렀다. 그리고 2025년에는 AI가 1위에 올랐다. 3년 연속 부동의 1위였던 '친구'가 2위로 밀려났고, 사람을 지칭하는 키워드는 모두 하락했다.

이런 변화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AI가 친구를 대체했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조금 다르다. ‘AI’와 ‘친구’에 각각 붙는 감성어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AI 연관 감성어에서는 '신기하다', '설명하다', '궁금하다', '믿다'가 두드러진다. 친구의 연관 감성어는 '편안하다', '행복하다', '따뜻하다', '특별하다'가 특징적이다. 이 키워드들은 결이 확연히 다르다. AI는 인지적이고 기능적인 공감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반면, 친구는 정서적이고 관계적인 공감으로 함께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AI 쪽에 등장하는 ‘믿다’라는 감성어다. 정서적 안정은 여전히 친구에게서 찾지만, 판단과 해석에 대한 신뢰는 AI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즉, 감정을 해석하는 대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이 분화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민하지?”라는 질문을 AI에 던지고 “오늘 월요일이라 예민했어”라는 말은 친구에게 건넨다. AI는 감정을 정리하는 도구이고, 친구는 감정을 함께 나누는 존재다. 대체가 아닌 역할의 재배치다.
작은 이유로도 모일 수 있는 시대
자신을 정교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동시에 관계의 부담을 조정한다. 러닝 크루, 클라이밍 크루처럼 취미 기반의 모임이 급속히 확산된 시기가 있었다. 기존 소모임과의 차이점은 친목이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즐기되 개인적인 연락은 하지 않고 모임 외 만남을 지양하는 룰이 중요했다.
물론 현재에도 크루 활동은 유효하지만, 여기에 새로운 모임이 추가됐다. 바로 ‘경도 모임’과 ‘감튀 모임’이다. ‘경도’는 ‘경찰과 도둑’, 어릴적 술래잡기다. 저녁 8시, 중고 거래 어플을 통해 동네 공원에 모인 성인들이 편을 나눠 뛰어다닌다. 공원을 지나다가 참여자로 오해받는 웃픈 일화도 등장한다. 감튀 모임도 마찬가지다. 약속한 시각에 동네 패스트푸드점에 모여 감자튀김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해산한다.

달라진 점은 모이는 데 필요한 이유의 크기다. 러닝 크루는 '달리기'라는 지속적인 취미가 있어야 했다. 경도는 ‘술래잡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 감튀 모임은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면 된다. 관계의 진입장벽이 관심사의 깊이에서 관심사의 존재로 낮아진 것이다. 느슨함과 안전함이 전제돼 있다면 아주 작은 이유로도 모일 수 있다.
이 변화는 2030 세대의 관계 지속에 대한 욕망을 보여준다. 앞선 데이터에서 확인했듯 '따뜻하다', '행복하다', '편안하다'는 여전히 사람에게만 붙는 언어다. 연결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연결의 방식이 달라졌다. 깊이보다는 넓이, 결속보다는 느슨함. AI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인간성의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감 이후의 브랜드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설명하려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애 때문이 아니다. 설명은 통제의 방식이고, 통제는 불확실성을 견디는 기술이다.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는 순간, 막연함은 구조가 된다. AI가 신뢰를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뜻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호함을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친구는 그 정리된 문장을 함께 소비하는 존재가 된다. 감정은 정리되고, 공유되고, 다시 개인화된다.
이 변화는 설득 방식 자체를 바꾼다. 과거에는 감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메시지가 효과적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감정을 지시하는 순간, 소비자는 한 발 물러선다. 이미 스스로 해석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래 남는 콘텐츠는 감정을 완결하기보다 여지를 남긴다. 소비자가 각자의 경험을 덧붙일 공간을 확보할 때, 메시지는 비로소 개인의 것으로 흡수된다.
브랜드 역시 소비자가 스스로를 재정의할 수 있는 장치를 제공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브랜드는 이런 색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대신 사용 데이터나 취향 선택을 통해 소비자가 “나는 이 브랜드를 이렇게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다. 브랜드의 역할은 소비자가 자신을 설명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가깝다. 신뢰는 기능과 정보의 정확성에서 쌓이고, 확산은 각자가 다른 의미를 붙일 수 있는 여지에서 일어난다.
한편, 연결은 반드시 깊고 장기적일 필요가 없다. 한 번의 참여, 하나의 결과 화면, 짧은 교환만으로도 충분히 성립한다. 가볍기 때문에 부담이 적고, 부담이 적기 때문에 다시 참여할 수 있다. 연결은 느슨해졌지만 그만큼 반복 가능해졌다. 브랜드 경험에서도 한 번에 강하게 각인시키는 대형 캠페인보다 여러 번 접속할 수 있는 작은 장치들에서 새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 브랜드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브랜드의 언어가 개개인의 언어로 다시 발화될 때, 브랜드는 가벼워진 관계 속에서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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