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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우리는 왜 연약함에 끌리는가

 

글 박윤진 / 국내 굴지의 광고 회사에서 삼성전자, KT, 네이버 등 유명 브랜드들의 마케팅을 담당했으며 현재는 '서울라이터'라는 브랜드 좋아하는 일을 활발히 이어가는 중. 저서로는 <다정한 기세>가 있다.

 


 

무심히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다 헉 소리와 함께 시선이 멈췄다. 어느 미인 대회 무대에 선 참가자가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그만, 앞니를 감쌌던 보철물 베니어가 통째로 빠져버린 것이다. 이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녀의 헉 소리 나는 순간은 온 SNS와 뉴스에 도배됐다. 아직 어려 보이던 모습이라 멘탈이 걱정됐다. 하지만 나의 우려는 기우일 뿐이었다. 다시 뜬 영상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헉 소리를 냈다. 다시 마이크 앞에 선 그녀는 원래 자신의 덜 고른 치아를 당당히 드러낸 뒤 카메라 앞에서 빠진 베니어를 다시 끼우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와, 진정한 퀸의 마인드.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며 정면 돌파를 택한 그녀의 당당함에 나도 사람들도 다시 한번 환호했다.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던 아이돌이 예능 게임에선 실수를 연발할 때, 카리스마 넘치던 배우가 기자회견에선 손을 떨며 긴장할 때 사람들은 호감을 느낀다. 왜 우리는 이렇듯 취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까. 사회심리학자 엘리엇 애런슨의 ‘프랫폴 효과(Pratfall Effect, 엉덩방아 효과)’는 이를 설명해준다. 능력 있는 누군가가 작은 실수나 허점을 보일 때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하며 그를 더 매력적이고 친근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요즘 사람들은 흠결 없이 완벽한 브랜드보다 자신의 단점이나 취약점을 겸허히 드러내는 솔직한 브랜드에 더 깊은 애정을 느낀다.

 

 

결점에 이름까지 붙여준 치토스

과자를 먹을 때 가루가 손에 묻는 것만큼 성가신 일도 없다. 책을 읽거나 노트북 타자를 치거나 휴대폰을 보면서 먹다 보면 손이 금세 더러워져 이 모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불편함으로 가장 유명한 제품은 바로 치토스다. 하지만 치토스는 이 주황색 가루를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뒤바꿨다. ‘치틀(Cheetle)’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면서 말이다.

 

치틀의 시작은 2021년 슈퍼볼 광고에서부터다. MC 해머의 고전송 <U can’t touch this>에 맞춰 우스꽝스럽게 등장한 주인공은 내내 치토스를 먹으며 가루 묻은 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더러워진 손 덕분에 그는 집안일, 업무, 아기 돌보기 등 각종 손 쓰는 일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불편을 긍정으로 유쾌하게 뒤집은 셈이다. 다음 해에는 캐나다 앨버타 주의 ‘치들’이라는 작은 마을에 치토스를 쥔 세 손가락 모양의 5m 동상을 세워 각종 뉴스를 장식했다. 이후엔 자주 쓰는 손에 치틀이 묻어 다른 손을 쓰게 되며 생긴 엉망진창 글씨를 ‘Other Hand Font’라는 폰트로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제품의 가장 큰 결점을 강점으로 바꿔버린 치토스, 이제 치틀은 치토스를 즐기는 사람들의 유쾌한 증표가 됐다.

 

 

 

기다릴 가치가 있는 느린 케첩, 하인즈

미국 시장 점유율 70~80%에 달하는 세계 1위 케첩, 하인즈. 하지만 이 케첩엔 유일한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제품이 너무 진해 유리병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케팅 천재 하인즈는 이 속 터지는 단점을 ‘기다릴 가치가 있는 품질’이라는 메시지로 뒤집었다. 이후 하인즈는 제품 라벨을 약 45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붙인 제품을 선보였다. 제품의 기울어진 라벨이 지면과 일직선이 되는 순간, 그 때가 바로 케첩이 가장 잘 나오는 최적의 각도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미국의 대표 자동차 경주 대회인 나스카(NASCAR) 경기 중에는 0.57초짜리 광고도 선보였다. 하인즈 병에 적힌 ‘57’에서 착안한 이 광고는 1초도 안 되는 0.57초 초스피드 광고로 레이싱이라는 프로그램 주제엔 딱 맞는 선택처럼 보였다. 다만 수십 년간 커뮤니케이션 해온 ‘느린 케첩’이라는 콘셉트와는 다소 어긋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한 수 위였다. 너무 짧아 놓쳐버린 0.57초 광고를 다시 보기 위해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총 네 가지 속도로 이 영상을 재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중 ‘하인즈만큼 느리게’ 모드로 광고를 보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5달러 할인 코드가 숨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느림의 가치를 이색적인 방법으로 전달한 셈이다. 하인즈는 이 캠페인으로 다시 한번 마케팅 강자의 면모를 증명했다.

 

 

뻔뻔함의 미학, 라이언에어

라이언에어는 불친절한 서비스, 좁은 좌석, 끝없이 붙는 추가 요금으로 악명 높은 유럽의 저가 항공사다. 최근 라이언에어는 비행기 얼굴에 사람의 눈과 입을 합성한 기묘한 캐릭터를 만들어 브랜드의 단점을 유머로 소비하는 영리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어노잉 오렌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캐릭터는 귀엽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오히려 욕쟁이 할머니처럼 고객의 불만에 뻔뻔하고 거침없는 답변을 남긴다. 한 고객이 다리를 뻗을 수가 없다고 불평하면 “그럼 걸어가든가”라고 답한다. 좌석 간격이 너무 좁다는 불만에는 “14.99유로를 내고 탔는데 뭘 기대했어? 창문이라도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고 답한다. ‘하늘을 나는 버스’라고 비난하면 비행기 내부에 버스 손잡이를 합성한 영상을 올리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St0pAsk1Ng’이라고 쏘아붙인다. 사람들의 악플에 더한 악플로 받아치는 이 캐릭터 전략은 라이언에어를 기분 나쁘지만 재미있는, 하지만 가격 하나는 확실히 저렴한 항공사로 브랜드를 재정의하고 있다.

 

@ryanair

 

 

악플로 앨범까지 내는 리퀴드 데스

친환경을 추구하는 악마 콘셉트로 파격적인 마케팅을 펼쳐온 물 브랜드, 리퀴드 데스. 언제나 비범한 행보를 보여주는 그들은 SNS와 고객센터로 쏟아진 악플들을 모아 매년 헤비메탈 앨범을 제작한다. 앨범 제목은 <Greatest Hates>. ‘히트곡 모음집’을 뜻하는 ‘Greatest Hits’를 ‘Hates’로 비튼 이름이다. 브랜드를 향한 악플만 엄선한 이 앨범에는 ‘이건 마케팅 쓰레기다’, ‘차라리 수돗물을 마시겠다’, ‘이름이 왜 이따위냐’ 같은 문장들이 그대로 가사에 담겨 있다. 각 곡은 전문 뮤지션들을 섭외해 완성도를 높였고 스포티파이에 정식 등록해 스트리밍까지 열었다. 심지어 LP로 제작해 한정 판매하기도 했다. 리퀴드 데스의 슬로건은 ‘Murder Your Thirst’. 갈증을 해소하는 대신 살해하라는 과격한 메탈 감성을 추구한다. 우리가 싫다면 더 화끈하게 싫어하게 해주겠다는 브랜드 정신이 그대로 담긴 Greatest Hates 캠페인은 볼륨3까지 이어지며 리퀴드 데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자산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롯스럽다’던 롯데리아에 등장한 침착맨

최근 롯데리아는 브랜드를 조롱하던 인물을 과감히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스스로의 약점을 끌어안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 주인공은 침착맨. 롯데리아를 향해 ‘근본이 없다’, ‘롯스럽다’며 비판과 애정을 동시에 드러냈던 침착맨을 모델로 기용하는 파격을 감행한 것이다. 31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침착맨은 단순한 광고 모델이 아니라 실제 롯데리아와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대표 소비자로서 캠페인의 중심에 섰다. 티저 영상 ‘롯데리아 또 이상한 거 한다!’ 편에서는 침착맨의 과거 발언을 지켜보는 법무팀 직원의 굳은 표정을 통해 롯데리아와 침착맨의 만남을 예고하는 설정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어 공개된 ‘침착맨이 닭달해서 나온 치킨버거의 근본’ 편에서는 침착맨이 직접 매장을 방문해 제품을 분석하고, 결국 ‘닭달’ 끝에 제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려 멋진 제품을 완성하는 서사를 담았다. 현재 영상은 각각 271만회, 535만회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이어가고 있다. 롯데리아는 이번 캠페인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역이용하며 고객과의 거리를 한 걸음 더 바짝 좁히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최근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페이커는 AI가 완벽해질수록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은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미 우리는 그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AI가 딸깍 만들어낸 가짜 콘텐츠의 범람, SNS에서 마주하는 완벽하게 가공된 이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덜 완벽하고 더 거친 것, 그래서 더 인간적인 것을 원한다. 약점은 더 이상 숨겨야 할 오점이 아니라 대중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솔직한 통로가 된다. 지금의 대중은 완벽한 스타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인플루언서에게 마음을 연다. 브랜드 역시 흠결 없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약점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고객과 더 가까워진다. 결국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다. 취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태도. 그 안에서 나와 닮은 인간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 가장 강력한 브랜드는 가장 인간적인 브랜드다. 연약함을 숨기지 않는 담대함, 그 솔직한 용기가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전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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