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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다양성을 확장하는 새로운 언어

 

글 차예진 / 컬러풀브레인친구 대표,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컬러풀브레인프렌즈:신경다양성> 저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라는 단어는 사실 아주 오래된 개념은 아니다. 오티즘(자폐 스펙트럼), ADHD, 틱, 난독증 등 이미 존재해온 특성들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시 묶어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언어와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이미 사회 전반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개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칸 라이언즈 2025’에서는 첫날 세션으로 ‘신경다양성 마인드(Neurodiversity Mind)’가 다뤄졌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 광고 회사 HAVAS의 CEO는 내부 연구 결과 Z세대의 50% 이상이 스스로를 신경다양성으로 인식한다고 밝혔다. 이는 진단의 증가라기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준 자체를 다시 바라보는 세대적 태도 변화에 가깝다.

글로벌 IT 기업들 역시 이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은 이미 사고방식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경다양성 인재 채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집중의 방식, 소통의 리듬, 문제 해결의 경로가 다르다는 점은 더 이상 조직의 부담이 아니라 경쟁력을 확장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문화를 더 창의적이고 다채롭게

문화 영역에서도 변화는 분명하게 이어지고 있다. 국민일보는 신경다양성 예술인을 발굴하기 위한 ‘아르브뤼 미술상’을 4회째 운영하며 예술과 표현에 대한 기준을 확장하고 있다. 기술적 완성도나 기존 미학의 잣대보다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 자체를 창작의 가치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신경다양적으로 움직이기–야호야호 프랙티스 워크숍’과 같이 신경다양성을 주제로 한 실천적 문화 실험도 등장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신경다양성을 설명하거나 해석하기보다 각기 다른 감각과 인지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움직이고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지 참여자가 직접 탐색한다.

 

지난해 열린 ‘제3회 아르브뤼 미술상’ 수상작들. (왼쪽부터) 이진원 작가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이백조 선생님>, 강다연 작가 <가족>, 권세진 작가 <Car parade on the Road> / 출처 kmibartbrut.or.kr
모두예술극장에서는 신경다양성 어린이를 위한 참여형 문화 콘텐츠인 ‘야호야호’ 시리즈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 출처 @modu.arttheater

 

공간과 경험을 다시 설계하는 시도

신경다양성에 대한 인식 변화는 공간과 경험을 설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에서는 최근 ADHD-friendly 시네마가 등장했다. 이 영화관에서는 관객이 영화를 보며 뜨개질, 드로잉, 자수, 낙서 같은 손 작업을 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거나 완전한 어둠을 견뎌야 하는 기존 관람 규칙을 의도적으로 완화한 것이다. 상영관 안에는 작은 책상, 따뜻한 조명, 편안한 좌석을 마련해 몸을 움직이거나 손을 쓰는 행위를 방해 요인으로 여기지 않고 집중과 몰입을 돕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신경다양성을 특별한 배려로 분리하지 않고 다양한 감각을 전제로 한 관람 경험으로 재구성한 사례다.

비슷한 접근은 뷰티 브랜드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러쉬(Lush)는 신경다양성 관련 활동을 전개하는 비영리단체 KultureCity와 손을 잡았다. 매년 4월 ‘오티즘 인식의 달’을 기념해 센서리 백(Sensory Bag), 소음 차단 헤드폰, 피젯(Fidget) 도구 등을 매장 내에 배치함으로써 감각 자극에 민감한 고객이 보다 편안하게 매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매장 직원들은 감각적 요구를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교육도 받는다. 이는 신경다양성을 메시지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감각적 경험을 대중화하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레고(LEGO)의 행보도 인상 깊다. 레고는 감각 민감성을 고려한 센서리 인클루전(Sensory Inclusion)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이는 특정 집단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누구나 각자의 감각 강도가 있으며, 모두가 서로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제품에 해바라기 목걸이(Sunflower Lanyard)를 적용한 사례 역시 상징적이다. 장애 등의 이유로 도움이 필요할 수 있음을 알리는 국제적 표식으로, 이를 놀이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신경다양성을 설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만든다. 강조나 계몽 대신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다.

 

(위) 러쉬는 KultureCity와 협업해 매년 4월 신경다양성 관련 캠페인을 펼친다. (아래) 레고는 감각 민감성을 고려한 가이드라인을 공개하고 해바라기 목걸이를 착용한 피규어도 제작한다. / 출처 kulturecity.org, lego.com

 

콘텐츠가 보여준 또 하나의 가능성

이 흐름은 콘텐츠 영역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내 신경다양성 콘텐츠 <컬러풀 브레인 프렌즈>는 개인의 특징을 교정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각기 다른 뇌를 가진 다람쥐들이 친구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일상을 그리며, 이 차이를 사회적 갈등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해당 콘텐츠는 ‘202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2025 부산국제영화제’의 ACFM(Asian Contents and Film Market) 부산스토리마켓 한국 IP로도 선정됐다. 최근에는 세계 영문판권 계약까지 성사돼 글로벌 콘텐츠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는 신경다양성이 특정 국가나 제도에 국한된 담론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신경다양성은 더 이상 장애나 의료적 병명으로만 이해할 개념이 아니다. 특정 범주 안에 가둬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고, 관계를 맺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다시 보게 만드는 하나의 프리즘에 가깝다. 신경다양성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기준, 구조, 사고방식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가 그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전환의 지점에 서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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