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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Brand

키우치 주조_스토리를 증류하는 200년 양조장

 

글 이창현 / 20여 년째 일본에 거주하며 사케 소믈리에, 도쿄 시티 가이드, 여행 지리 검정 등의 자격을 보유하고 있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일본 에디터로 활동 중

 


 

마케터에게 ‘헤리티지’는 양날의 검이다. 오래된 역사는 강력한 무기지만, 자칫 고리타분한 문법에 갇히면 트렌드에 뒤처지기 십상이다. 여기, 1823년부터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키쿠사카리(菊盛)’라는 사케를 빚어온 노포 양조장이 있다. 바로 키우치 주조다. 수많은 전통 양조장이 저마다의 철학으로 장인정신을 외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이들은 전 세계 크래프트 맥주 시장을 흔든 히타치노 네스트 맥주를 탄생시켰고 이제는 글로벌 위스키 시장이 주목하는 히노마루 위스키로 또 한번 도약했다. ‘노포’라는 무거운 자산을 위트 있는 스토리와 역발상의 서사로 이겨낸 탁월한 스토리텔러, 키우치 주조의 마케팅 코드를 분석해보자.

 

 

 

CODE 1. 완벽한 오역(誤譯)이 만든 글로벌 시각적 트리거

1994년 일본 정부가 소규모 맥주 양조 규제를 완화하면서 이른바 지비루(지역 크래프트 맥주) 붐이 일어났을 때 키우치 주조는 사케를 넘어선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첫 단추부터 글로벌 시장을 정조준하며 브랜드 브랜딩에 과감히 투자했다. 뉴욕 지하철 노선도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비주얼 거장, 마시모 비넬리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한 것.

모티브는 단순했다. 양조장이 위치한 지명인 이바라키현 나카시의 코노스(鴻巣)가 ‘황새의 둥지’를 뜻하기 때문에 둥지(Nest)를 지키는 올빼미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황새가 아닌 올빼미인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는 올빼미를 '후쿠로(フクロウ)'라고 읽는데 이는 ‘고생하지 않는다(不苦労)’, ‘복이 온다(福来郎)’, ‘목이 좋아 돈이 잘 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키우치 주조가 예상한 이미지는 일본 전통의 묵직한 감성이 묻어나는 올빼미였다. 전통 사케 양조장의 정체성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욕에서 날아온 시안은 경영진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붉고 강렬한 컬러에 지극히 서구적인 팝아트 서브컬처 느낌의 올빼미에 "우리 양조장의 분위기와 너무 맞지 않는다"라는 사내의 우려가 있었지만, 경영진은 거장의 글로벌 감각과 직관을 믿고 이 파격적인 로고를 그대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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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치노 네스트 맥주는 현재 다양한 라인업을 선보이며 세계 수제 맥주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 출처 ⓒkiuchibrewery.co.jp

 

다행히 이 이국적이고 위트 있는 올빼미 로고는 진중하고 무겁기만 했던 당시의 수제 맥주 시장에서 독보적인 시각적 심볼로 자리 잡았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 캐릭터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크래프트 맥주 전성기가 도래하자 이 올빼미는 전 세계 50개국 소비자의 뇌리에 빠르게 각인되는 강력한 브랜드 자산으로 우뚝 섰다. 전통의 문법을 고집하지 않고 글로벌 소비자의 시각적 문법을 수용한 결단은 대성공을 거뒀다.

 

 

CODE 2. 골칫거리 찌꺼기, 진정성 있는 업사이클링

마케팅에서 스토리가 힘을 얻으려면 제품의 본질, 즉 진정성과 연결돼야 한다. 단순히 그럴듯한 서사를 지어내기만 하면 똑똑한 요즘 소비자들에게 금방 들통난다. 이런 관점에서 키우치 주조의 히트작인 키우치 매실주는 양조장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브랜드의 강력한 무기로 바꾼 업사이클링 마케팅의 교과서 같은 사례다.

맥주를 발효하고 여과하다 보면 최종 공정에서 대량의 맥주 찌꺼기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알코올을 머금은 이 부산물을 그대로 버리면 환경오염을 유발하는데, 그 처리 비용이 만만치 않아 오랫동안 양조장의 애물단지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공장이 이를 단순 폐기물로 처리할 때 키우치 주조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가진 증류 기술을 활용해 이 아까운 자원을 다시 순환시킬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들은 맥주 찌꺼기를 모아 다시 증류하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오렌지와 허브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독창적인 맥주 스피리츠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특별한 베이스에 지역 농가에서 수확한 최고급 매실인 시로카가(白加賀)를 추가했다. 주정이나 사케에 매실을 달게 빚던 기존 매실주 시장에 세계 최초의 ‘맥주 베이스 매실주’라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가 탄생한 순간이다.

 

지역 농가에서 수확한 최고급 매실인 시로카가(白加賀)를 추가해 세계 최초로 맥주 베이스 매실주를 탄생시켰다. / 출처 @kiuchibrewery

 

처음에는 "맥주로 매실주를 만들었다고?"라며 낯설어 하던 소비자들은 이 술에 담긴 내러티브와 기막힌 반전의 맛에 금방 매료됐다. 화이트 에일 특유의 산뜻한 허브 향과 매실의 천연 산미가 자아내는 독특한 밸런스는 호평을 받았다. 2009년 일본 최대 규모의 매실주 품평회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전통 매실주 160여 개 명주를 제치고 최종 1위에 올랐다. 환경을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철학과 제품의 본질에 집중한 정공법이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독보적인 성공 사례다.

 

 

CODE 3. 로컬의 자부심을 세계의 언어로 번역

최근 키우치 주조가 양조장의 200년 명운을 걸고 확장 중인 메인 프로젝트는 바로 크래프트 위스키인 히노마루 위스키다. 브랜드명에서부터 일본의 국기를 뜻하는 ‘히노마루’를 전면에 내세웠다. 일본 내에서도 다소 과감하고 직관적이라 느낄 수 있는 이 네이밍의 이면에는 철저하게 글로벌 시자을 조준한 ‘국가 브랜드 후광 효과’ 전략이 치밀하게 깔려 있다.

현재 전 세계 주류 시장에서 재패니즈 위스키의 위상은 하이엔드 장르로 자리 잡았다. 키우치 주조는 위스키 증류소를 기획할 때부터 내수 시장이 아닌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어설픈 서양식 이름이나 모호한 네이밍으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흉내 내기보다 "우리가 가장 잘 만드는 진짜 일본의 위스키"라는 정체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인 히노마루를 선택했다.

브랜드 네이밍은 직관적인 정공법을 택한 대신 비주얼 아트는 극도의 세련미를 추구했다. 일본 최고의 타이포그래피 거장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사바 카츠미와의 협업을 통해 히노마루 모티브 위에 한 줄의 실루엣을 겹쳐 격조 높은 라벨을 완성시켰다. 그 실루엣의 정체는 바로 황새다. 키우치 주조의 본점이자 위스키 원액을 증류하는 마을인 코노스 지명을 시각화한 전략으로, 글로벌을 상징하는 국가와 로컬을 하나의 라벨 안에 완벽하게 녹여낸 브랜딩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제품 자체에도 스토리의 일관성을 부여했다. 전통 사케 양조장의 기술력을 증명하듯 몰트뿐만 아니라 일본주를 빚을 때 쓰는 주조호적미를 30% 배합한 '히노마루 위스키 코메'를 시그니처 라인업으로 선보였다. 전 세계 위스키 마니아들이 "오직 전통 사케를 빚던 200년 노포만이 만들 수 있는 세상에 없던 위스키 맛"이라며 열광하게 만든 완벽한 제품 내러티브의 완성이다.

 

 

 

200년이 넘은 브랜드가 노쇠하지 않고 매번 힙한 트렌드의 중심에서 글로벌 소비자를 사로잡는 비결은 무엇일까? 키우치 주조의 행보는 세 가지 명확한 비전과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헤리티지를 박제하지 마라

그들은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되 가두지 않았다. 사케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맥주를 빚을 때는 세계적인 뉴욕 디자이너의 팝아트를 수용했고, 위스키를 만들 때는 세련된 모던 아트를 입혔다. 헤리티지는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시대의 언어로 끊임없이 재해석할 때 비로소 자산이 된다.

둘째, 브랜드의 약점을 서사로 반전시켜라

‘버려지는 맥주 효모’라는 부정적인 부산물을 전통의 기술력을 더해 '세상에 없던 매실주'라는 독창적인 내러티브로 반전시켰다. 브랜드가 가진 취약점이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진정성 있게 마주할 때 가장 강력한 팬덤을 만드는 스토리가 탄생한다.

셋째, 가장 로컬한 정체성이 가장 글로벌한 무기다

세계 무대로 나아갈 때 그들이 꺼내 든 카드는 서구 문화 따라하기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터를 잡고 있는 지역의 지명인 코노스∙히타치노와 그 지역의 쌀∙매실을 글로벌 시장의 크래프트 맥주, 싱글몰트 위스키의 규격에 맞춰 정교하게 번역해냈다.

 

지루한 전통의 문법을 깨고 전 세계 소비자의 취향을 사로잡은 빨간 올빼미와 황새의 날갯짓. 매너리즘에 빠진 브랜드의 새로운 정의와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키우치 주조의 유연하고 영리한 브랜딩은 신선한 자극과 통찰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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