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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압착 사회, 브랜드가 남겨야 할 것은?

 

글 노준영 / 소비∙마케팅 트렌드 분석 전문가.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 흐름을 마케터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실제 비즈니스에 적용할 수 있는 인사이트로 해석. 저서로는 <요즘 소비 트렌드> 시리즈, <알파세대가 온다>, <이것이 메타버스 마케팅이다> 등.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 만에 본다. 드라마 한 시즌도 요약 영상 한 편이면 따라잡을 수 있고, 책 한 권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콘텐츠도 인기다. 긴 영상에는 주요 구간을 알려주는 타임스탬프가 달리고, 기사와 보고서는 AI를 활용해 몇 줄로 요약한다. 이 모든 현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능한 한 빨리 결과에 도달하고 싶은 욕구다.

물론 시간을 아끼려는 마음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우리는 늘 불필요한 과정을 줄이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왔다. 다만 최근에는 정보를 간추리는 수준을 넘어 브랜드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 필요한 과정과 맥락까지 생략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압축’과 ‘압착’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압축이 ‘불필요한 요소를 걷어내고 핵심을 남기는 것’이라면, 압착은 ‘이해에 필요한 과정과 맥락까지 눌러버리는 것’이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정리하더라도 핵심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압축’이다. 반면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맥락을 모두 생략한 채 결말만 소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짧은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검색, 쇼핑,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정과 맥락을 생략하는 ‘압착’이 점차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판단하고, 더 빠르게 구매한다

OECD PISA 2025 결과도 이러한 변화와 함께 살펴볼 만하다. 한국 학생들의 읽기 평균 점수는 501점으로 OECD 평균인 461점보다 여전히 높지만, 2022년과 비교하면 15점 하락했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OECD가 함께 분석한 ‘성급한 응답(hasty responses)’이다. 내용을 충분히 읽지 않고 답해 정답을 맞히지 못한 응답의 비중은 OECD 국가 평균에서 2018년 이후 4%포인트 이상 증가해 2025년 약 9%에 이르렀다.

물론 이를 숏폼이나 디지털 콘텐츠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던져볼 수 있다. 우리는 정보를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판단을 내리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비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난다. SNS에서 제품을 발견하고, 영상을 시청하거나 검색과 리뷰를 확인한 뒤 곧바로 구매한다. 구글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이러한 소비 행동을 스트리밍(Streaming), 스크롤링(Scrolling), 검색(Searching), 쇼핑(Shopping)의 ‘4S’ 로 설명한다. 소비자는 더 이상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구매 퍼널을 이동하지 않는다. 네 가지 행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구매를 결정한다. 콘텐츠의 길이뿐 아니라 구매에 이르는 과정도 압축되고 있는 셈이다.

 

 

설명은 짧게, 브랜드 경험은 깊게 

그렇다고 소비자가 정보 자체를 외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유튜브 이용자의 쇼핑 관련 콘텐츠 시청 시간은 300억 시간을 넘어섰으며,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구글이 진행한 조사에서도 한국 시청자의 73%가 ‘유튜브가 구매 결정에 도움을 줬다’고 응답했고, Z세대에서는 그 비율이 87%에 육박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난다. 제품을 발견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짧아졌지만, 구매를 결정할 때는 여전히 충분한 맥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화장품 하나를 발견하는 데는 10초면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구매를 결정하려면 사용감이나 다른 소비자의 평가 등을 확인해야 한다. 결국 소비자는 정보 자체를 없애기보다 필요한 정보에 도달하기까지의 불필요한 과정을 줄이길 원한다.

최근 브랜드 캠페인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이케아는 로블록스를 활용해 이용자가 브랜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을 선보였다. 기업의 특징이나 조직문화를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용자가 가상 공간에서 이케아의 업무를 수행하고 공간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이해하도록 한 것이다. 짧은 콘텐츠에 많은 정보를 담기보다 직접 참여하고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설명은 간결하게, 경험은 풍부하게 만든 사례다.

 

 

 

비비고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비비고는 세븐틴과의 협업에서 단순한 제품 노출을 넘어 소비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스냅샷과 게임형 효과를 활용했다. 기존의 댄스 중심 챌린지가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비비고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프레임을 구성하고, 이를 활용해 촬영한 스냅샷을 영상으로 공유하도록 했다. 제품에 대한 설명은 간결하게 전달하면서도 브랜드의 상징적인 요소를 직접 경험할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

 

 

덜어낼 과정과 남겨야 할 맥락

K-뷰티 브랜드 SKIN1004는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틱톡샵을 활용해 소비자가 콘텐츠를 시청하던 플랫폼 안에서 제품을 발견하고 구매까지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총 매출액이 8.58배 증가하고 뷰티 카테고리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이 사례에서는 구매를 위해 외부 플랫폼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였다. 반면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이나 크리에이터의 경험을 살펴보고, 라이브 방송에서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등 브랜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정은 그대로 유지했다. 브랜드가 줄여야 할 대상은 소비자가 보내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가치 없는 시간’이다.

 

SKIN1004는 인도네시아 틱톡샵에서 크리에이터 협업과 동영상·라이브 쇼핑 광고를 활용해 제품 탐색부터 구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간소화했다. 소비자가 플랫폼을 벗어나지 않고도 제품을 살펴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하면서 총거래액(GMV)이 8.58배 증가한 성과를 거뒀다. / 출처 ⓒads.tiktok.com

 

 

그렇다면 브랜드는 어디까지 줄여도 괜찮을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브랜드마다 ‘맥락의 최소 단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해당 정보를 삭제했을 때 소비자의 이해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가령 ‘당 함량 30% 감소’라는 메시지에서 비교 기준이 빠진다면 어떨까? 기존 제품 대비 30% 감소했는지, 다른 제품과 비교한 결과인지 알 수 없어 소비자의 판단에 혼란을 줄 수 있다. 브랜드가 제품을 만든 이유나 경쟁 제품과의 차별점, 소비자가 신뢰할 만한 근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보 없이 ‘요즘 난리 난 제품’, ‘SNS에서 화제’, ‘품절 임박’이라는 표현만 남긴다면 콘텐츠는 짧아질지 몰라도 브랜드의 고유한 가치는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모든 브랜드에는 더 이상 줄이면 본래의 의미가 달라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무조건 짧은 콘텐츠보다 ‘선택적 깊이’에 주목해야 한다. 10초를 할애하는 소비자에게는 그 안에 관심을 가질 이유를 제시하고, 30초를 할애하는 소비자에게는 제품의 차별점을 보여주며, 3분을 투자하는 소비자에게는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자들은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 가치 없다고 느끼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짧지만 이해하기에 충분하고, 판단에 필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시대다. 더 짧게 만들고 더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브랜드가 고민해야 할 질문은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무엇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 앞으로 브랜드의 차이를 만드는 핵심은 바로 이 판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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