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차현나 / 소비자데이터연구소 소장. 하이브 데이터랩 실장, 스타벅스코리아 1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KT경제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냈고 저서로는 <사고 싶은 마음의 공식>, <데이터 쓰기의 기술>, <문과생,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되다> 등이 있다.
과거엔 특정 연령대에 맞춰 행동하는 사회적 시계(Social Clock)가 강하게 작동했다. 나이는 곧 역할이었고, 역할은 소비의 취향과도 연결됐다. 이러한 연령 규범은 소비시장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기업은 연령과 생애주기를 기준으로 소비자를 구분하고 그에 맞는 상품과 메시지를 설계했다. 그런데 이제 점차 나이의 의미가 희석되고 있다. 단일한 연령 기준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상황과 관심사에 따라 ‘서로 다른 나이의 나’를 오가는 현상을 ‘멀티에이지(Multi-Age)’라고 부르고자 한다.
멀티에이지는 단순히 ‘자신의 연령대와 다른 취향을 소비하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여러 취향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나’를 활성화하는 현상에 가깝다. 나이에 맞춰 소비하는 것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소비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세대 간 라이프스타일 스위칭
일상 소비재 전반에서 세대 간의 소비 양식이 뒤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융 플랫폼 토스는 만 7~18세 전용 서비스인 ‘틴즈’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청소년을 단순한 용돈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돈을 관리하고 금융 생활을 경험하는 경제적 주체로 바라본다. 10대에게 성인 수준의 핀테크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잠재 고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장수 브랜드들의 행보도 보인다. 직장인의 회식 관련 제품으로 여겨졌던 숙취해소제 '컨디션'은 슬림한 스틱젤리 제형 출시, 숏폼 댄스 챌린지, 뮤직 페스티벌 스폰서십을 통해 Z세대의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장수 스낵 '꼬깔콘' 역시 광고와 SNS에서 낭만 스낵 소환술 등의 챌린지를 전개하며 젊은 세대의 놀이 문법을 적극 차용하고 있다. 전통주인 ‘백화수복’을 감성 캠핑과 접목해 감성주 마케팅을 이어가는 전략도 비슷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역방향으로, 글로벌 캐릭터 브랜드 팝마트(POP MART)는 피규어를 아이들의 장난감이 아니라 성인을 위한 감성 수집품으로 포지셔닝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성인 직장인들이 ‘백꾸(가방 꾸미기)’를 하며 키링과 인형을 수집하는 모습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다.
아이돌이나 애니메이션 팬덤도 더 이상 1020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하는 제품과 공연 티켓을 얻기 위해서라면 세대를 불문하고 오픈런과 티켓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를 단순히 ‘시니어가 젊은 취향을 따라가는 현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1990년대에 1세대 아이돌을 좋아했던 사람이 4050 세대가 된 뒤에도 팬으로 남는 것처럼 취향은 나이와 함께 반드시 리셋되지 않는다. 10대 때 만화책으로 보았던 <슬램덩크>를 40대에 영화로 보며 세대 간 취향을 공유하기도 한다. 소비의 기준이 '내 나이에 어울리는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재미와 효용을 얻고 싶은가'로 이동한 셈이다.

럭셔리와 스트리트가 허문 연령의 벽
연령 경계의 붕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시장은 패션과 럭셔리 산업이다. 과거에는 패션의 유행이 상류층에서 시작해 대중으로 확산되는 ‘하향 전파(Trickle-Down)’의 관점이 강했다. 하지만 현대 패션에서는 스트리트와 서브컬처에서 출발한 스타일이 럭셔리로 흡수되는 ‘상향 전파(Trickle-Up)’ 역시 중요한 흐름으로 나타난다.
2017년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는 하이패션과 스트리트웨어의 성공적인 조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이후 디올과 나이키 에어 조던, 구찌와 아디다스 등 다양한 협업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는 젊은 세대의 문화로 여겨졌던 스트리트와 스포츠의 미학이 연령을 넘어 럭셔리 소비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럭셔리 브랜드의 진입 연령 자체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베인앤드컴퍼니(Bain & Company)의 ‘글로벌 럭셔리 리포트’에 따르면, 젊은 소비자의 럭셔리 시장 진입이 빨라지고 있으며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대체로 18~20세에 럭셔리 구매를 시작한 반면 다음 세대는 약 15세부터 구매를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다. 카드지갑이나 키링 같은 비교적 접근성이 높은 제품군, 스니커즈와 스트리트웨어, 그리고 디지털∙리셀 문화의 확산은 젊은 소비자가 럭셔리와 만나는 접점을 넓혔다.
여기에 럭셔리 하우스들이 10대 K-팝 아이돌을 글로벌 앰버서더로 전격 발탁하고 있다. 10대 아이돌이 가진 신선한 문화적 에너지를 브랜드의 자산으로 흡수하기 위함이다. 1020 팬덤에게는 브랜드를 일찍부터 친숙한 문화적 대상으로 만들고, 기존 고객에게는 브랜드가 젊고 동시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제공해 브랜드의 타깃 연령층을 양방향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준다. 하나의 브랜드나 제품의 타깃이 더 이상 단일한 연령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렇게 여러 시장에서 확인되고 있다.

늙어가는 사회, 젊게 느끼는 개인
실제 나이와 별개로 스스로를 몇 살처럼 느끼는지를 의미하는 ‘주관적 연령(Subjective Age)’으로도 멀티에이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의 중위연령이 가파르게 오르는 현상 이면에,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실제보다 더 젊게 느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오픈서베이의 ‘2025년 시니어 트렌드 조사’에서도 50~79세 소비자들이 실제 연령보다 자신의 마음 나이를 젊게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는 ‘자주 또는 항상 내가 성인이 됐다고 느낀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어서는 시점이 만 28세 정도로 나타난다. 법적으로는 19세부터 성인이지만,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절반 정도의 사람이 심리적으로 자신을 성인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실제 연령과 주관적 연령의 부조화는 이제 새로운 기준이 되고, 멀티에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관점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써야 할 상식: 연령(Demographics)에서 맥락(Context)으로
그렇다면 마케팅에서 ‘MZ세대’나 ‘3040 여성’ 같은 연령 구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연령은 여전히 유용한 인구통계학적 정보다. ‘멀티에이지’라는 개념도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를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소비자의 연령을 이해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으로 삼아 나이만으로 고객을 단정하는 전략이 시대와 맞지 않게 됐을 뿐이다.
같은 40대라도 어떤 사람은 부모이고, 무자녀이거나, 혼자 살기도 한다. 나이가 같아도 어떤 사람의 취미는 러닝이며, 독서를 좋아하거나, 재테크에 몰입하기도 한다. 같은 사람이더라도 월요일에는 직장인으로, 주말에는 학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연령 데모그래픽 외에 참고할 만한 관점 중 하나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제시한 '할 일 이론(Jobs-to-be-Done, JTBD)'이다. 소비자의 구매 이유를 연령만으로 설명하기보다 특정 상황에서 해결하려는 문제와 욕구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40대 여성에게 필요한 제품’보다 ‘퇴근 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제품’이라는 설명이 소비자의 니즈에 더 부합할 수 있다.
멀티에이지 시대의 마케팅은 ‘나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이로 사람을 정의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제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연령대로 설명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소비자는 더 이상 ‘나이’라는 좁은 상자에 갇혀 살지 않는다. 지금 마케터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 소비자는 몇 살인가?”에 더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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