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였다. 길치였던 사실을 과거형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스마트폰 덕분이다. GPS만 찍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가 서 있는 방향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기술 덕택에 나는 더 이상 길치가 아니다. 아무리 처음 가는 골목이라도, 아무리 후미진 곳에 있는 맛집이라도 가장 가까운 길로 단숨에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길을 잘못 든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즐거움들을 죄다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어쩌면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릴 자유를 빼앗긴 것일지도 모른다.
사보 기고를 부탁받았다. 그것도 자유주제로. 자유주제라니, 나는 마치 다시 길치가 된 것 같았다. 제아무리 유능한 지도 앱이라도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법이다. 무엇에 관해 이야기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문제 속에서 답을 찾기로 했다. 자유주제니까 자유. 나는 이번 기고의 목적지를 ‘자유’로 정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가장 큰 본성이라 했던가, 아니면 인간의 가장 큰 권리라고 그랬던가. 어쨌거나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광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래 가던 길을 벗어난 곳에서 의외의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듯 크리에이티브라는 녀석도 예기치 않은 곳에 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 이제, 우리가 알던 광고의 지도를 벗어난 크리에이티브의 세계를 자유롭게 거닐어보자.
탈브랜드의 자유 Lacoste - Save our species
▲ Lacoste x Save Our Species (출처: LACOSTE 유튜브)
브랜드 심볼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규정짓는 하나의 약속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크리에이티브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고를 가진 브랜드 중 하나인 라코스테는 무려 85년 동안 지켜온 악어 아이덴티티를 다른 동물들로 바꿔버렸다. 라코스테는 ICUN(세계자연보전연맹)의 동물보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악어 심볼 대신 수마트라 호랑이, 카카포 앵무새 등 멸종위기동물로 지정된 10종의 동물들을 티셔츠에 새겼다. 남아있는 동물들의 개체 수만큼 한정판으로 제작된 이 티셔츠는 모두 완판되어 동물보호 기금에 힘을 보탰다. 라코스테의 이 캠페인은 브랜드의 존재를 증명하는 악어 심볼보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아주 대담하게 담아냈다. 브랜드로서 브랜드를 포기하는 것. 이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는 없다.
연출의 자유 Apple - Homepod
▲ HomePod — Welcome Home by Spike Jonze — Apple (출처: Apple 유튜브)
광고는 더 이상 광고인만의 영역이 아니다. 영화 <그녀(her)>의 감독으로 익숙한 스파이크 존스 감독이 애플 홈팟 광고의 연출을 맡았다.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이 광고는 2018 칸 광고제 필름 부문에서 골드를 수상했다. 애플 홈팟의 광고는 소비자 접점인 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홈팟이니까 집. 뻔한 장소적 설정이다. 그러나 스파이크 존스 감독은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그는 홈이 주는 공간적 속성을 자유롭게 분해하는 파격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그것도 CG가 아닌 디테일한 공간연출력으로. 집의 벽면은 콘크리트의 특성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늘어나고, 수많은 사진이 붙어있던 벽면은 삽시간에 쭉 늘어나 컬러풀한 무대로 변신한다. 집이되, 결코 집이 아닌 공간. 가장 익숙 하지만 가장 낯설어진 그곳에서 우리는 홈팟이라는 제품이 우리에게 주는 진가를 만나게 된다.
매체로부터의 자유 일본 사가현 - The Edible Business card
▲ Edible Business Card (Nori Supers) (출처: Geometry Global Japan 유튜브)
영상매체엔 영상광고를 인쇄매체엔 인쇄광고를. 매체에 맞춰 광고를 제작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광고인들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여기 그 한계를 뛰어넘은 크리에이티브가 있다. 일본 규슈 사가현에서는 자신의 지역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김을 택했다. 사가현은 지면 대신 김을 매체로 삼고, 김 위에 특수 레이저 기술로 지역 유명인들의 명함을 제작했다. 지역특산물이었던 김이 지역을 홍보할 가장 확실한 매체이자, 본질이자, 메시지가 된 셈이다. 먹을 수 있는 명함이라는 상식적이지 않은 발상. 이 기막힌 크리에이티브는 2017 스파이크 아시아에서 브론즈를 수상했다.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제약과 싸운다. 제작비와 제작기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물론이요, 브랜드와 제품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리의 크리에이티브를 방해하는 장벽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광고는 이래야 한다’는 통념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정해진 길만 좇는 내비게이션으로는 빛나는 크리에이티브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GPS를 끄고 길을 잃어버리자. 당신 앞에 놓여있는 브랜드와 제품, 그리고 광고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지자. 지금껏 읽은 수십 권의 광고·마케팅 서적이 알려준 지침은 잊고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보자. 그 곳에 우리가 간절히 찾던 크리에이티브라는 단어가 기다리고 있다. 크리에이티브할 자유는 이미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 자유를 실현하는 일은 길을 잃을 줄 아는 크리에이터의 몫이다
박수진 CⓔM / 크리에이티브솔루션 10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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