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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Play

나의 필름 세상

 

최근 들어 외출할 때 가방에 꼭 챙기는 물건이 생겼다. 바로 필름 카메라. 세상에 알려진 이름은 ‘펜탁스 에스피오 140’이다. 1994년의 어느 날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찍기 위해 거금을 들여 이 카메라를 데려왔다.

엄마의 필름 카메라는 내 삶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나와 함께 했다. 유치원 행사에 한껏 치장한 차림으로 렌즈를 보는 모습, 벚나무 아래서 노란 원피스를 입고 서럽게 엉엉 우는 모습, 이제는 대학생 딸들을 둔 친척오빠가 총각 시절 나를 어깨에 얹고 다니던 모습들을 모두 담으며.

 

자라면서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디카’ 붐은 중학생이 될 무렵 찾아왔다. 언제나 곁에 있던 펜탁스 필름 카메라는 캐논 디지털 카메라에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사라졌다. 엄마는 더 이상 필름을 현상하러 사진관에 가지 않았다. 메모리칩에서 사진을 가져오는 것조차 번거로운 일이 될 정도로 사진 찍는 건 쉬워졌다. 그렇게 점점 그 묵직한 카메라를 잊어갔다.

 

코닥 필름으로 찍은 첫 필름 사진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2020년 초봄에 필름 카메라를 다시 발견했다. 동생과 옷장 정리를 하다가 어릴 적부터 쓰던 카메라들이 있는 상자를 꺼내는 바람에 옛 기억이 무수히 소환됐다. 평소 같았더라면 잠깐 추억팔이를 하고 다시 넣었겠지만 이날은 왠지 달랐다.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처음 카메라를 산 엄마 나이가 된 내가.

필름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챙겨 가장 가까운 사진관에 무작정 찾아갔다. 리튬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필름 교체하는 법을 간단히 배운 후 그날 오후 친구들과의 약속에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그게 내 필름 사진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 망한 사진이 많았다. 아무리 작동이 쉬운 자동 필카라도 내 손에 익어야 쉽지 첫 롤을 찍을 때는 전부 까맣게 나오지 않을지 걱정되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망한 필름 사진은 까맣지 않고 형태가 아예 없더라고요... 다행히도 첫 도전이 실패하지 않아 흥미를 잃지 않았다.

 

시선이 담는 것들

내 사진의 피사체는 주로 친구들이다. 함께 만나는 시간 속에서 친구들은 내가 만든 프레임 속에 착착 담긴다. 그 말은 즉, 담고 싶은 그들의 모습이 있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친구들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제법 잘했다. 귀엽거나, 예쁘거나, 웃긴 상황을 기억해뒀다가 그리는 것이 일종의 취미였다. 핸드폰이 생긴 후에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남겼다. 나는 내가 담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했고, 그들 또한 사진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 때가 많았다. 거기서 재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펜탁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필름 카메라는 그런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다. 물론 핸드폰 카메라 앱을 열어 1초 만에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도 간편하다. 하지만 신중히 필름을 고른 후 그 필름의 특징을 생각하며 장소와 빛이 어우러지게 촬영할 때의 기분은 왠지 특별하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시간을 붙잡아 기록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현상되어 나온 사진을 보면 유독 그 순간의 조명, 온도, 습도... 그리고 사진 찍을 때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다행히 친구들은 모델이 되는 걸 즐기곤 한다. 그렇다 보니 사진 찍는 순간이 더욱 즐겁고 소중하다. 여행의 재미를 잠시 잃은 코로나 시대에 사진은 일상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나의 새로운 목표는 외국에서 필름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필름 사진을 시작해 다른 나라에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찍으러 가고 싶은 곳은 많다.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는 도쿄와 런던, 아인트호벤, 산호세, 뉴욕까지. 하나하나 세다 보니 사진은 점점 핑계가 되어간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친구들아, 딱 기다려!

2020년 초부터 지금까지 3년 동안 내가 찍은 롤을 세어보니 30롤 정도가 되어간다. 그러나 아직 필름 사진에 대해 초보자 수준의 지식만 가지고 있다. 딱히 더 진지하게 공부할 생각도 없다. 이 세상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정말 많아 어떻게 저런 사진을 남기는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의 바람은 하나, 재미있는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남기고 싶다.

취미의 가치는 아마도 이 지점에 숨어있는 듯하다. 더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는 것.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오늘도 온전히 즐기기만 한 사진을 현상하러 스튜디오에 다녀왔다. 어떤 사진들이 또 나의 필름 세상을 채워줄지 기대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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