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파타야까지
여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 도착하자 자정, 다시 두 시간 버스를 타고 파타야의 거대한 리조트에 도착하니 새벽 2시. 이 여정이 4박 5일간의 일정 중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순조로웠다. 슬리퍼를 끌고 나가서 아침에는 조식 뷔페를 먹고 낮에는 듣고 싶은 프로그램을 골라서 들었고 저녁에는 주최 측에서 준비해준 파티에서 맥주와 와인을 마셨고 밤에는 시내에 나가서 마사지를 받거나 리조트에서 수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Transform : 여성과 밀레니얼 세대로의 변화
올해 ADFEST의 주제는 ‘Transform’, 최근 몇 년간 어느 컨퍼런스에서든 자주 듣고 있는 주제였다.
그래서 빅데이터와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ADFEST에서는 기술이나 도구가 아닌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가장 두드러지는 화두는 역시 ‘다양성과 페미니즘’. 숨어있던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광고계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게티이미지에서 참석한 한 연사는 최근 몇 년간 많이 판매된 이미지를 분석하며, 광고계가 바라는 여성의 이미지가 Pretty Woman에서 Gritty Woman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색량으로 본다면, ‘Woman+Hero’는 105% 증가, ‘Woman+Grit’는 90% 증가, ‘Heroin’은 80% 증가했다고 한다. (2017년/2016년의 비교, 게티이미지가 매년 발표하는 이미지 트렌드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게티이미지는 작년부터 포토샵으로 후보정을 한 모델의 이미지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변화에 대응하는 회사를 넘어 변화를 만들어가는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가치관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BBDO 인도에서 온 젊은 여성 기획자는 본인이 기획한 세탁 세제 Ariel 광고를 소개했다. 카피는 “Why is laundry only a mother’s job?” 인도 여성들의 과중한 가사부담을 이슈로 남성도 빨래를 하자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아빠의 시선으로 딸의 가사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남편의 행동을 바꾸려면 아내 혹은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 나이가 많은 남자인 장인의 목소리여야 설득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같은 페미니즘을 지향하더라도 유럽이나 미국과 다른 상황에서 출발하고 다른 전략으로 접근해야 하는 아시아의 페미니즘 콘텐츠를 접하게 되어 좋았다.
▲Ariel-Why is Laundry only a mother’s job? (출처: Ariel India 유튜브)
영국 D&AD의 연사는 41년 경력의 원로 광고인이었다. 그는 광고계에 예전보다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많이 유입되지 않는 것을 문제로 짚으며, 훌륭한 인재들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는 광고계가 다시 매력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밀레니얼 세대들이 원하는 것은 워라밸을 넘어서 가치를 심어주는 회사여야 한다며, D&AD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교육이라고 했다. 실제로 D&AD에는 카피라이팅, 광고주 커뮤니케이션, 디지털 콘텐츠 제작까지 흥미로운 트레이닝 코스가 다양하게 마련되어있었다. 대부분이 원데이 코스인데, 강의료가 80만원을 훌쩍 넘는 것이 어쩐지 신뢰가 간다(?). 얼마나 훌륭한 프로그램인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주니어부터 시니어까지 대부분의 광고인이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AD의 시도에서 광고대행사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하는 일 중에는 교육 사업도 있다는 희망도 보였다.
Winners : 이집트와 일본의 활약
이번 ADFEST에는 이집트가 처음으로 참석해 필름 부문 대상을 받았다(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쳐있는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문화·종교적으로는 서남아시아라고 한다). 지난해 이집트에는 엄청난 국가적인 경사가 있었는데, 2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이집트는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콩고를 꺾고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이런 유연한 사고는 이번에 대상을 탄 Orange 통신사의 광고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이집트 국민들의 터질 듯한 기대감을 유머러스하게 잘 대변해줬다.
광고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들이 잔뜩 나와서 랩을 하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월드컵 진출만 오매불망 기다려온 축구팬들이다. 28년 만에 기적적으로 기회를 잡았으나, 문제는 이 축구 광팬들의 몸이 쇠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축구팬들이 이집트 대표 선수들을 향해 조곤조곤 협박한다. 28년 기다렸어. 4년 뒤에 나는 죽고 없어. 기회가 또 있다고 말하지마. 나에겐 이번이 마지막. 그러니까 잘해라. 알았지?
▲Orange - Now or Never (출처: Orange Egypt 유튜브)
일본은 올해 ADFEST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여줬는데, 무려 7개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Print Craft 부문에서 대상을 탄 광고였다. 일본의 카나자와 고등학교에서는 해마다 ‘전국 고등학교 스모대회’를 개최하는데 그 역사가 101년이 됐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아마추어 스모대회이지만, 젊은 세대들이 스모를 고루하고 지루한 스포츠라고 생각해 해마다 그 인기는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쿠호도는 스모의 낡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여고생 스모선수들을 모델로 인쇄광고를 만들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고등학교 스모대회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고등학교 스모대회 광고를 이런 대형 광고대행사가 만든다는 것도 놀라웠다. 스모계의 비주류인 여자 스모선수들을 주목했지만(여자 스모선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이 광고가 이번 ADFEST의 주요 화두였던 페미니즘을 말하는 광고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펄럭이는 교복 치마에 시선을 가게 하는 대신에 진짜 스모복을 입은 스포츠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보는 순간, 박력 있는 자세와 아름다운 아트웍 때문에 ‘스모를 한번 해보고 싶다’ ‘스모를 한번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든것도 사실이다.
It’s not dead. It’s just sleeping.
이번 ADFEST에는 Radio 부문의 대상과 금상이 없었다. 상을 발표하며 사회자가 말했다. “아쉽게도 라디오 후보작에서는 수준 이상의 작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년에 출품될 라디오 광고들을 기대합니다. 라디오는 죽은 매체가 아닙니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라디오가 진짜 죽은 것 같아서 슬퍼졌지만, 이 말을 똑같이 나와 한국의 광고인들에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대홍기획이 그 잠에서 가장 크게 깨어나기를 기대한다.
노윤주 CⓔM / 전략솔루션본부 3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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