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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신념이 가치를 만들 때_ 확장되는 팬덤의 비밀

 

글 박한나 / 에피파니 프로젝트 대표. 19년 차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팀, 비마이프렌즈 CMO 등으로 활약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집회에서 촛불 대신 등장한 건 형형색색의 응원봉이었다. 각기 다른 팬덤을 상징하는 응원봉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서로의 ‘최애’가 다르지만 공동의 신념 아래 하나가 됐다. 응원봉은 이제 단순한 팬심의 표현을 넘어 새로운 집단 의사표현의 언어가 된 것이다. 전통적인 마케팅이 효과를 잃어가는 시대에 이런 팬덤의 진화는 브랜드와 소비자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팬덤의 본질적 진화

한 브랜드의 진정한 팬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과거 K-pop이나 스포츠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팬덤 현상이 이제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건 단순한 현상의 확장이 아니다. 브랜드와 소비자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매년 애플의 신제품 발표회는 전 세계적인 축제가 된다. 애플의 팬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제품을 기다리고, 브랜드를 옹호하고, 애플의 철학을 공유하는 신도와도 같은 존재다. 테슬라는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테슬라 운전자들은 자신을 단순한 전기차 소유자가 아닌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움직임의 일부로 여긴다.

 

상하이 모터쇼에서 테슬라 차량 주변에 모인 팬들 / 출처 @Tesla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현대의 소비자들은 더 이상 브랜드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브랜드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고 때로는 제품 개발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이키가 단순한 운동화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무브먼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트레이더 조스의 장보기가 특별한 경험이 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진정성이 만드는 성공

많은 기업들이 팬덤 문화를 활용하려다 실패한다. 디스코드 채널을 만들고, 멤버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바이럴 마케팅을 시도하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왜일까? 이들은 팬덤의 겉모습만 따라 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팬덤은 마케팅 전술이 아닌 브랜드의 진정성에서 시작된다.

코스트코의 1.50달러 핫도그는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됐다. “핫도그 가격을 올리면 죽일 것(If you raise the effing hot dog, I will kill you)”이라는 창업자 Jim Sinegal의 발언은 단순한 입담이 아니다. 이는 고객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브랜드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고, 소비자들은 이에 열광적인 지지로 화답했다.

 

(좌) 1985년 출시 이후 1.5달러에서 한 번도 가격을 올리지 않은 코스트코의 핫도그. 한국 코스트코에서도 2천원으로 유지 중이다. (우) 과감한 디자인, 트렌디한 밈으로 언어 배우기를 가볍게 여기도록 유도하는 외국어 공부 서비스 듀오링고. / 출처 costco.com, @duolingokorea

 

파타고니아는 이런 진정성을 환경 분야에서 보여준다. 30억 달러 규모의 기업을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신탁에 넘긴 것은 단순한 PR이 아니다. 수십 년간 이어온 환경 운동의 결정판이었고 실제로 파타고니아는 환경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마다 매출이 증가하는 경험을 했다.

듀오링고는 어떻게 평범한 언어 학습 앱에서 문화가 됐을까? 때로는 카오스에 가까워 보이는 그들의 SNS는 사실 ‘재미있는 언어 학습’, ‘모두가 학습에 중독됐으면 좋겠다’라는 브랜드 미션의 완벽한 실천이었다. 그들의 부엉이 마스코트가 밈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도전과 기회

디지털 시대는 팬덤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는 브랜드에게 양날의 검이다. 기회는 더 커졌지만 리스크도 커졌다. SNS는 브랜드와 팬의 관계를 실시간으로 만들었다. 환경을 강조하는 패션 브랜드의 공급망에서 문제가 발견되거나, 기업의 내부 문화가 외부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공개된다. 과거처럼 불일치를 숨기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투명성은 진정성 있는 브랜드에겐 오히려 기회다. 파타고니아가 환경 문제에 대해 논쟁적인 입장을 취할 때, 팬들은 이를 자발적으로 확산시킨다. 코스트코가 불황 속에서도 직원 친화적 정책을 고수할 때, 팬들은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대변인이 된다. 이런 입소문의 힘은 그 어떤 광고보다 강력하다.

 

글로벌 뷰티 브랜드 러쉬는 2021년, 소셜미디어로 인한 위험 노출 등이 자사의 지향 방향과 맞지 않다는 판단 하에 인스타그램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소비자는 이들의 가치와 이념에 따른 행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 출처 @lushkorea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고객들은 모바일앱에서 경험한 브랜드의 가치를 매장에서도 똑같이 기대한다. SNS에서 보여준 브랜드의 모습이 실제 고객 서비스에서도 일관되길 바란다. 이건 단순한 기술 통합의 문제가 아니다. 브랜드의 진정성이 모든 접점에서 동일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의미다.

콘텐츠 진정성에 대한 의미도 커졌다. 브랜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지만 동시에 진정성도 지켜야 한다. 성공적인 브랜드들은 여기서 팬들을 참여시킨다. 팬들이 직접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고 전파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콘텐츠 확보를 넘어 커뮤니티의 유대를 강화한다.

 

우리, 마케터들을 위한 시사점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애플, 파타고니아, 코스트코 같은 브랜드들이 자주 언급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전술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이들이 추구한 근본적인 변화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REI는 미국 최대의 아웃도어 장비 협동조합으로 가치소비, 진정성을 중심으로 2400만 팬덤을 유지하고 있다. / 출처 @rei

 

첫째, 팬덤은 만드는 게 아니라 키우는 것이다. 단기 캠페인이나 바이럴 전략을 넘어 팬덤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단순한 홍보 채널이 아닌 진정한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 브랜드의 목적의식은 이제 마케팅 슬로건이 아닌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코스트코의 핫도그나 파타고니아의 환경 활동이 보여주듯, 진정성 있는 실천은 결국 강력한 팬덤으로 이어진다. ROI를 넘어 커뮤니티의 건강성을 고민해야 할 때다.

마지막으로, 브랜드와 소비자의 수직적 관계는 끝났다. 현대의 팬덤은 브랜드와 함께 성장하길 원한다. 이는 통제를 내려놓고 팬들과 함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여정이다.

 

응원봉이 시민의 목소리가 되고, 브랜드가 사회 변화를 이끄는 시대다. 성공적인 마케팅의 핵심은 기술과 인간적 연결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응원봉이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듯, 진정한 팬덤은 브랜드의 진정성과 목적을 한 순간의 전략이 아닌 조직의 근본적인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일관되게 실천하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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