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주연 / 미식 칼럼니스트. <MorningCalm>, <ASIANA>, <KTX 매거진>에서 기자로 일했다. 영화와 미식을 접목한 소셜다이닝 ‘시네밋터블’을 운영한다. 저서 <봄은 핑계고>.
맥도날드의 투자와 철회, 식중독 파동, 디지털 대전환의 국면을 지나오며 치폴레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유연함을 선보였다. 치폴레가 너겟 없는 시대에 어떻게 대표주자로 올라섰는지, 급변하는 식문화와 지형도에서 생존하고 성장했는지 살펴보자.
“치콜레?” BTS 정국이 유튜브 채널에서 치폴레 보울을 먹으며 이름을 다르게 발음한 적이 있다. 치폴레는 재빠르게 SNS 계정명을 ‘치콜레(Chicotle)’로 바꾸며 “이제부터 우리는 치콜레다”라고 위트 있게 반응했다. BTS 팬클럽 아미가 이에 호응하자 치폴레는 아미를 대상으로 무료 식사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또 미국의 유명 미식축구 선수 트래비스 켈시가 트위터에 올린 오타가 뒤늦게 화제를 모았다. 그는 “수업에서 치료까지, 지금 내게 절실한 것은 치폴테(Chipolte)”라고 썼다. 최근 켈시가 테일러 스위프트와 사귀며 이 트윗이 다시 화제를 모으자, 치폴레는 아예 그가 활약하는 캔자스시티에 있는 매장의 간판을 ‘치폴테’로 바꿨다.
이 재치 있고 유연한 태도는 치폴레라는 브랜드의 본질을 보여준다. 치폴레는 멕시칸 패스트푸드를 판매하는 회사다. 그러나 ‘패스트푸드답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 틀림을 비난하지 않고 웃으며 포용하고, 때로는 거대 자본의 압박을 뿌리치며 신념을 지켜냈다. 그렇게 치폴레는 ‘진짜 음식’이라는 철학을 고수해왔다.
인간과 자연의 공생, 정직한 음식을 추구하는 치폴레. 질 좋은 재료를 강조하는 이들은 소비자와의 장기적인 신뢰 구조를 형성했다.
신념 있는 소비라는 만족감
1993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시작한 치폴레는 1998년 맥도날드로부터 투자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16개 매장에서 시작해 2005년에는 500개를 넘겼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아침 메뉴 도입’, ‘드라이브스루 운영’, ‘대규모 광고 집행’, ‘재료비 절감’ 등을 요구했다. 치폴레는 이를 거절하고 신선한 재료와 직접 조리 원칙을 고수했으며 끝내 프랜차이즈화도 하지 않았다. 결국 2006년 치폴레는 맥도날드와 결별했고 세간의 우려와 달리 더욱 독립적이고 진정성 있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됐다.
당장의 손익보다 철학을 우선시하는 이 고집은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라는 브랜드 자산으로 되돌아왔다. 소비자들은 치폴레의 음식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고, 그 믿음은 반복적인 구매로 이어졌다. 패스트푸드 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신뢰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치폴레 매장에 들어서면 고객은 줄을 서서 원하는 재료를 고르고 직원과 소통하며 메뉴를 완성한다. 즉석에서 조립되는 식사는 기성 제품을 꺼내 제공하는 전통적인 패스트푸드와는 다르다. 메뉴 구성 역시 단백질, 복합 탄수화물, 식이섬유, 지방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다. 치폴레의 ‘진짜 음식’은 슬로건이 아니라 실제 그릇 안에 구현된다. 고객이 식사 한 끼를 통해 신념 있는 소비를 했다는 만족감은 단순한 배부름 이상을 제공한다.
치폴레는 건강한 음식뿐만 아니라 재생 에너지를 활용하는 주방, 비건레더를 사용한 인테리어, 생분해 가능한 식기 등 지속가능성을 중요히 여김을 드러낸다.
Z세대가 너겟 대신 선택한 소울푸드
한때 미국 어린이의 소울푸드였던 치킨 너겟은 Z세대에겐 점점 멀어지는 음식이다. 너겟이 분쇄육과 가공 부산물로 만들어진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가공된 식품이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영양소의 균형을 중시하고 비건·로컬·지속가능성을 고려하는 이들에게 너겟은 구시대적 음식이다. 반대로 치폴레는 이들의 가치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치폴레의 한 그릇에는 건강, 투명성, 지속가능성이 담겨 있다. 이런 경향은 SNS에서도 확인된다. Z세대 소비자들은 ‘무엇을 먹느냐’보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원물 그대로 색색의 재료가 담긴, 수제 느낌이 물씬 나는 치폴레 보울은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바이럴 요소가 됐다. 브랜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식사가 된 셈이다.
치폴레는 같은 멕시칸 패스트푸드를 표방하는 타코벨과 종종 비교된다. 타코벨이 대규모 공장에서 가공된 식재료를 사용하고, 대부분의 조리 과정을 표준화된 프로세스로 처리하는 반면 치폴레는 매장에서 직접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을 여전히 많은 부분 고수한다. 덜 가공된 식재료를 사용하고, 조리 과정의 수작업 비율이 높기 때문에 식사의 신선도와 품질 면에서 더욱 신뢰를 얻고 있다. 타코벨이 저렴하고 강한 맛, 화려한 광고로 재미있는 정크푸드를 표방한다면, 치폴레는 질 좋은 재료와 건강한 한 끼를 지향한다. 한편 고객이 매장에서 재료를 고르고 맞춤형으로 조립하는 형식이 유사해 써브웨이와도 비교된다. 하지만 써브웨이는 친이스라엘 기업으로 알려졌으며 프랜차이즈 매장 점주와의 잦은 마찰 등 다양한 부정적 이슈로 브랜드 이미지를 거듭 실추했다.
위기를 기회로
2015년 식중독 사태로 치폴레도 위기를 맞는다. 이 사건은 치폴레가 지역 농장에서 직접 공급받는 신선한 재료를 고집한 데서 비롯됐다. 대형 공급망을 이용하지 않고 지역 기반의 분산된 공급 체계를 운영하면서 식재료의 추적성과 일관성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일부 매장에서 위생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건강한 식재료를 위한 철학적 선택이 오히려 브랜드 역사상 가장 큰 위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창업자 스티브 엘스가 직접 나와 거듭 사과했으나 상황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1년 만에 매출은 크게 줄었고 그전까지 15배 이상 상승하던 주가는 반토막 났다. 끝내 엘스가 CEO 자리에서 물러나며 브라이언 니콜이 새 CEO로 부임했다. 니콜은 타코벨 출신임에도 치폴레의 철학은 유지하면서 기술을 도입해 온라인 주문, 모바일 앱, 디지털 주방, 드라이브스루 시스템인 ‘치폴레레인’을 구축했다. 이 디지털 전환은 뜻밖에도 곧이어 도래한 팬데믹 시대의 생존 기반이 됐고 동시에 소비자 경험의 질도 높였다. ‘건강하게, 빠르게, 편리하게’를 모두 만족시키는 구조가 된 것이다.
치폴레는 위기를 넘어 업계의 질서 자체를 바꿨다. 치폴레 모델은 ‘패스트 캐주얼 다이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그 범주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치폴레와 흡사한 구조와 개념이지만 멕시칸 대신 지중해 음식을 표방하는 카바(CAVA)의 인기가 심상치 않으며 스윗그린(Sweetgreen) 또한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후발주자다. 이제 패스트푸드는 단지 빠른 음식을 넘어 건강하고 정직한 식사를 의미할 수 있음이 증명됐다. 치폴레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에 있어 단지 선두 주자가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됐다.
치폴레는 트렌드를 쫓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무항생제 고기, 신선한 채소, 진짜 요리라는 철학은 Z세대의 웰니스, 슬로우에이징, 장 건강, 식물성 식단과 정확히 연결된다. 오타도, 발음 실수도, 식중독도 브랜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였지만 치폴레는 이를 유쾌하게, 때론 철학적으로 대응했다. 이 유연하면서도 일관된 태도가 곧 브랜드의 생존전략이었다. 결국 치폴레는 브랜드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중 하나가 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안다. 이 브랜드는 진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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