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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결핍을 채워주는 ‘직접’ 경험의 시대

 

글 손하빈 /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 대표

 


 

인공지능(AI)의 활용이 일상이 된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자주 AI로 흘러간다. AI가 해내는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인간인 나는 이제 뭘 잘할 수 있나’에 대한 무력감이 함께 존재한다. 한편 동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들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고민 앞에 멈추게 된다. 사람들의 결핍은 늘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험하고 느끼는 감각의 소중함

요즘의 결핍은 몸으로 움직여 직접 하는 경험의 부족에서 온다. 스마트폰을 열고, 몇 번의 클릭만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상에서, 우리는 몸으로 부딪히며 겪는 직접 경험들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 읽은 책 <경험의 멸종>에서도 디지털 세상에서 사람들이 편리함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사람들이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피하기 위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 간접 경험에 점점 의존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는 힘을 잃어간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여행지에 갔다고 생각해보자. 리뷰가 없는 식당에 우연히 들어가서 먹어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타인이 이미 경험한 결과에 의존해 의사결정을 하고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느라 스스로 겪고 느끼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숲 영상으로 숲을 경험할 수 있고 캠핑을 하지 않아도 캠핑 브이로그를 통해 캠핑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숲에서 느끼는 자연의 감각, 캠핑을 직접 준비하며 몸으로 체득하는 노하우는 얻을 수 없다. 배달앱에 익숙해지면 요리하는 과정이 번거로워진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에서 벗어나는 대신 직접 경험하며 느끼는 기쁨, 성취감 또한 느끼지 못한다. 대리 경험은 결국 시간을 들이지 않고 남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만 소비하게 만듦으로써 감각하는 법을 잊게 한다.

 

 

최근 지인인 아부다비 아이들이 한국에 놀러 왔다. 여름비가 한창 내리던 때였다. 비 오는 것을 처음 본 아이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려고 했다. 동화책으로만 보던 비를 직접 맞으며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표출했다. 사막 기후에서 살기 때문에 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직접 맞아본 경험은 그 어떤 AI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AI 시대에 인간으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그건 대리 경험이 아닌 직접 경험, 몸이 직접 느끼는 오감과 감정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땀을 흘리고 감각을 깨우는 웰니스 산업이 급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지털 세계가 커지고 강해질수록 반대급부로 직접 몸으로 느끼는 경험에 대한 수요도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험을 설계하고 있다면 디지털 시대에 살기 때문에 더 요구되는 욕구들을 고려해야 한다.

 

감각 회복을 위해 오프라인 경험을 찾는 사람들

최근 많은 오프라인 팝업이 열리고 있지만 실제로 감각을 자극하기보다는 디지털 경험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깊은 몰입보다는 ‘릴스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느낌이다. 오프라인 경험을 온라인에서 공유하게 만들기 위해 자극적인 비주얼로만 치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감각을 자극하는 오프라인 경험은 사람들의 ‘오감’을 깨워야 한다. 몸을 움직이거나, 손으로 쓰고, 그리고, 맛을 보는 것처럼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이어야 한다.

뮤지션 콜드플레이의 공연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연 중에 크리스 마틴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자”라고 호소한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던 관객들이 머뭇거리며 기기를 내려놓기 시작한다. 단 한 곡만이라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던 손을 내려놓고 시각, 청각을 모두 열어 음악에 집중하는 경험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들은 휴대폰을 끄고 콜드플레이 공연의 시그니처인 LED 팔찌(Xyloband)를 통해 연대하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했다. 노래에 따라 관객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LED 컬러를 통해 관객은 스스로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는 감각을 체화하게 된다.

 

(위) 콜드플레이 공연에서 LED 팔찌인 자이로밴드를 착용한 관객들은 관객 전체가 무대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래) 공연 전 스마트폰 잠금 파우치를 제공한 뮤지션 잭 화이트 / 출처 xylobandsusa.com, overyondr.com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한 곡을 온전히 들은 이후부터 공연에 집중하는 관객의 비율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해봤는데 정말 좋았어’라는 감각이 생겨나며 이후에 다시 찾게 되는 ‘재현 욕구’ 또한 발생한다. 록밴드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리더 출신 잭 화이트는 한 수 더 발전해 공연장에 들어오는 관객에게 스마트폰 잠금 파우치인 욘더(Yondr)를 제공했다. 공연장에 들어오면 관객들은 내내 스마트폰을 보지 못한다. 실제로 이 공연을 보고 온 사람은 처음으로 공연에 온전히 집중하고 음악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오프라인 경험을 설계한다면 오감을 얼마나 자주, 깊게 느끼게 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의미 있게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관계

SNS를 통해 일상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필터 처리된 이미지와 텍스트에 점점 익숙해지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며 관계를 맺는 일이 오히려 어색해졌다. 10대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통제 가능한 타인의 시선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피로가 쌓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매일 타인의 삶을 스크롤하며 구경한다. 하지만 꾸며진 이미지 속 타인의 삶을 오래 바라볼수록 내 관계에서 허기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이네켄의 디지털 디톡스 캠페인은 이 욕구를 정확히 짚어낸 사례다. “스마트폰 때문에 술자리의 대화가 약해진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지루함 모드(Boring Mode)’ 캠페인을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술자리에서도 사진을 찍느라, 대화 중에도 스마트폰을 보느라 대화가 끊기는 일이 자주 있다. 하이네켄은 여기서 벗어나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문자와 통화만 가능한 단순한 핸드폰을 실제로 제작하고 카메라 해상도를 일부러 낮추는 앱까지 내놓았다.

 

눌러서 영상 보기

 

올해에도 이 캠페인은 지속됐는데, 더 재미있는 발명품을 가지고 왔다. “건배(Cheers)”라는 소리에 반응해 자동으로 뒤집어지는 스마트폰 케이스 ‘플리퍼(The Flipper)’다. 실제로 스웨덴의 발명가와 만든 케이스라고 하니 하이네켄이 얼마나 진지하게 디지털 디톡스 경험을 퍼뜨리고자 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하이네켄은 자신의 경쟁사를 다른 맥주 브랜드가 아닌 술자리의 ‘스마트폰’으로 보고, 현시대 사람들의 결핍을 고려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서비스와 마케팅은 ‘의미 있는 관계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할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하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희소한 자원은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보다가 한두 시간이 훌쩍 흘러간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독서는 집중력 없이 하기 힘든 행위로 긴 텍스트를 읽을 때는 지속적이고 집중된 주의력인 ‘인지적 인내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스마트폰이 끝없이 던져주는 콘텐츠에 집중력을 내주고 만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 책을 읽는 커뮤니티 리딩 파티 / 출처 readingrhythms.co

 

이 집중력의 결핍을 채워주는 커뮤니티 사례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 퍼지고 있는 ‘리딩 파티(Reading Party)’다. ‘리딩 리듬(Reading Rhythms)’이라는 회사가 주도하는 이벤트로 수백 명의 독서인이 한 장소에 모여 휴대폰을 내려두고 함께 책을 읽는다. 정해진 시간 동안 조용히 읽고 이후 느낀 점을 나누는 공유의 경험이 함께 한다. 많은 독서 클럽이 있지만 리딩 파티가 다른 점은 ‘책을 읽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를 함께 읽는 경험’을 주는 것이다. 혼자 하는 고독한 활동인 독서를 ‘함께하는 경험’으로 재구성해 잃어버린 집중력을 돌려주고, 혼자서는 집중하지 못하는 독서 경험을 ‘만나서 함께 읽는 경험’으로 전환했다. 어떤 결핍을 채워주느냐에 따라 독서라는 행위가 전혀 다르게 설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험의 결핍’이 새로운 경험을 만드는 기회가 된다. 디지털 시대, AI 시대에 우리는 무엇에 결핍되어 있는가? 결핍 안에서 새로운 욕구가 탄생하고, 그 욕구와 결합된 경험만이 사라지지 않고 깊숙이 우리의 삶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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