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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오리지널리티를 넘어 새로운 글로벌 K

 

글 노가영 / CJ, KT, SK텔레콤에서 전략 리더로 성장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 중앙일보 ‘요즘 콘텐트 썰’, 매일경제 ‘노가영 작가의 문화 뒤집기’ 등을 연재. 저서로는 <콘텐츠가 전부다> 시리즈, <새로운 인류 알파세대> 등.

 


 

1990년대 초반, K는 단순히 ‘Korea’를 뜻하는 국가 식별 부호였다. 그런데 2020년 팬데믹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의 드라마와 음악을 ‘힙’하게 만들어 놓은 덕분에 지금의 K는 하나의 감성 코드이자 독보적인 콘텐츠 언어로 진화했다.

누가 뭐래도 2025년은 ‘케데헌의, 케데헌에 의한, 케데헌을 위한’ 한 해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넷플릭스 역대 시청 수 1위를 연이어 갱신하면서 K팝과 K드라마의 소셜 영향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더불어 OST 8곡이 무려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으며 대표곡 <골든>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신보가 발매되기 전까지 8주 연속 1위를 지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한국 자본도, 한국 제작사도 아닌데 전 세계가 이를 ‘K콘텐츠’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K가 이제 더 이상 제작 국가의 코드가 아니라 세계가 공유하는 새로운 문화의 언어가 됐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걸그룹 ‘헌트릭스’의 노래를 부른 가수 3인방(이재, 오드리 누나, 레이 아미)이 최근 미국 NBC 토크쇼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출연했다. 이 방송은 현지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케데헌의 글로벌 위상을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 출처@fallontonight

 

케데헌의 돌풍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람객 수가 전년 대비 72%나 증가했고, 제주항공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항공기 동체와 탑승권에 십장생도를 입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펼쳐진 ‘씻김굿’과 ‘시나위’ 같은 난이도 높은 전통 공연에 현지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CJ ENM의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해 한국 뮤지컬 최초로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쓸었고, 오랫동안 콩글리시라 불리던 ‘파이팅’은 마침내 옥스퍼드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K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 좌) 지난 7월 스페인 마드리드 마타데로 무용센터 극장에서 열린 공연 ‘문화를 잇는 몸짓’에서 선보인 시나위 (우) 한국 뮤지컬 최초로 토니상 6개 부문을 수상한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 장면 / 출처 @koficeculture, @nol.ticket

모방도, 자기복제도 아닌 본질로 승부

잠시 K의 르네상스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2019년 <킹덤>을 시작으로 <스위트홈>, <오징어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공통된 정서가 흐른다. ‘공포’와 ‘좀비’라는, 할리우드의 1940년대 B급 장르에서 비롯된 감각이다. 2020년에는 <기생충>과 BTS의 <다이너마이트>가 각각 아카데미 시상식과 빌보트 차트를 석권하며 전 세계를 뒤흔드는 슈퍼 바이럴을 일으켰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사실 하위계층이 상류계층을 골탕먹이는 풍자는 서양에선 200년 이상 내려온 꽤 익숙하고 오래된 내용이다. 오페라와 오페레타(오페라보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음악극)에서 단골로 쓰이던 소재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은 분명히 달랐다. 익숙한 서구적인 틀 위에 한국 사회 특유의 현실감과 리얼한 계급 구조를 덧입혀 완전히 새로운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식 오리지널리티, K-dentity다. K콘텐츠는 이제 모방을 넘어 자기만의 언어로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한국인 가정의 미국 정착기인 영화 <미나리>, 4대에 걸친 재일한국인 가족사를 대서사극으로 다룬 <파친코> 등 어느새 전 세계는 ‘한국’과 ‘한국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글로벌 시청자들은 한국의 문화, 사람, 전통을 알고 싶어서 한국 콘텐츠를 보고 한국을 방문한다. 그 문화가 좋으면 문화의 주인이 궁금해지고, 자연스럽게 ‘저들의 본질은 뭐지?’라는 탐구로 이어진다.

 

익숙한 서사를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성공한 이후 글로벌 시청자들은 ‘한국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제는 한국의 문화, 사람, 전통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사랑받고 있다. / 출처 ⓒ naver.com, @NetflixKorea, @AppleTV

글로컬과 컨버전스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2026년의 K-dentity는 무엇인가. 케데헌의 돌풍이 던진 가장 큰 메시지는 ‘융합의 힘’이다. 우선 구성적으로 뮤지컬의 서사 구조, 애니메이션의 표현력, K팝의 리듬이 하나로 녹아 들었다. 더 주목할 점은 내재적 정체성이다. ‘악령을 퇴치하는 K팝 아이돌’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이는 스스로의 서사를 노래하고, 전통과 현대를 뒤섞으며, 세계와 직접 대화하는 지금의 한국 청년 세대를 상징한다. 서사와 기술, 전통과 현재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융합의 정체성인 셈. 전통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임에도 팝 음악과 캐릭터 디자인이 글로벌 감성에 맞춰 조율되면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서사’로 완성됐다.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전통이나 한옥 미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서양의 익숙한 서사를 한국적 맥락으로 재해석해 성공했다면, <케데헌>은 역으로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다양한 입맛의 세계 언어로 번역해냈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의 ‘Something Special K’다! 앞으로 우리는 K를 특정 산업이나 국가의 영역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 핵심은 인물과 이야기 그리고 융합의 태도와 연결된 ‘글로컬(Global+Local)’의 진화로 접근해야 한다.

수백 년 전 조상들의 풍류와 해학이 21세기 글로벌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 진화하고 있다. K의 미래는 보존이 아니라 융합에 있으며, 그 융합의 태도가 바로 K-dentit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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