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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d-Issue

다시, 사람을 생각해

 

글 권정윤 /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학사∙석사∙박사,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 여러 산업군의 소비 트렌드 발굴 업무 수행.

 


 

AI뿐만 아니라 로봇, 메타버스 등 기술이 인류의 생활을 뒤덮고 있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소비자들은 ‘사람 냄새’를 찾고 있다. 전혀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비효율적이지만 따뜻한 감성을 전하는 ‘휴먼 터치’의 부상. 그렇다면 어떤 휴먼 터치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할까? 세 가지 유형으로 살펴보자.

 

시간과 에너지로 완성되는 인간의 영역

첫 번째는 ‘정성으로 통하는 휴먼 터치’다. 기술을 사용하면 더 쉽고 매끄럽게 만들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사람의 노력에 의존해 작업을 완성하는 경우다. 결과는 다소 어설플 수 있지만 과정에 들어간 정성과 진심이 매력으로 작용한다.

보이 그룹 피원하모니는 지난 9월 발매한 곡 <EX>의 리릭 비디오(Lyric Video, 구간별로 가사를 표시한 영상)를 스패니시 버전으로 공개했는데, 일명 ‘로우 테크(Low Tech)’ 연출로 인기를 얻었다. 노래 구간마다 해당 파트를 부른 멤버의 영상만 재생되고 나머지 멤버의 영상은 정지돼 있는데 알고 보니 편집이 아니라 멤버들 스스로 정지된 듯 가만히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누가 얼마나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잘 버텼는지 찾아내며 ‘수동 CG’의 정성에 열광했다.

 

보이 그룹 피원하모니는 최근 발매한 곡의 리릭 비디오를 '로우 테크'로 제작했다. 편집 기술이 아닌 멤버들 스스로 정지된 듯 가만히 있는 장면을 연출해 '수동 CG'의 정성을 보여줬다. / 눌러서 영상 보기

 

힙합 그룹 에픽하이도 휴먼 터치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매년 연말 콘서트 포스터를 유명 포스터의 패러디 형태로 제작하는데, 올해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합성인 줄 알았던 멤버들의 얼굴이 사실은 분장과 촬영으로 연출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중들은 놀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라임을 맞춘 ‘케이팝 되는 형들스’라는 제목, 애니메이션 속 그룹명인 ‘사자보이즈’를 본 따 만든 ‘사십보이즈’까지 위트가 넘쳤다. AI로 몇 초 만에 합성이 가능한 시대지만 팬들을 위해 분장과 촬영을 선택한 정성이 빛을 발한 사례다.

 

힙합 그룹 에픽하이는 매년 연말 콘서트 포스터를 유명 포스터의 패러디 형태로 제작한다. 올해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선택, 의상·분장·촬영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 출처 @blobyblo

 

두 번째 유형은 ‘감탄을 자아내는 휴먼 터치’다. 기술에 비해 덜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기술을 뛰어넘는 인간의 역량으로 감동을 선사하는 경우다. 최근 ‘고전’이 떠오르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전 문학을 읽고자 하는 Z세대가 많아지면서 국내에서는 2024년 이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등 세계문학전집의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도 클래식 연주를 직접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정명훈, 조성진, 임윤찬 등 유명 연주자들의 공연은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매진이다. 지금 대중들은 작가의 고뇌와 연주자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며 휴먼 터치를 경험하고자 한다.

 이러한 흐름은 대형 콘텐츠 플랫폼에서도 확인된다. 누구보다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넷플릭스는 휴먼 터치에 투자를 결정했다. 스톱 모션 기법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와 손잡고 차세대 스톱 모션 아티스트를 양성할 스튜디오를 설립하기로 한 것. ‘스톱 모션’이란 정지된 사물이나 인형을 프레임별로 조금씩 움직여 사진을 촬영한 후 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이어 붙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기법이다. 수작업이 많이 필요하고 제작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넷플릭스가 스톱 모션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특유의 따뜻한 느낌과 질감을 기술로 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 메이킹 영상. 그는 스톱 모션 기법 특유의 불완전함이 오히려 작품의 제작 과정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것 같아 아름답다고 말했다. / 눌러서 영상 보기 

 

마지막 유형은 ‘내 손으로 느끼는 휴먼 터치’다. 디지털의 일상화로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아날로그형 취미가 ‘힙한 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거나 좋은 글귀를 손글씨로 필사하는 등 디지털 기술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그 과정을 하나의 낭만으로 생각한다. 이는 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30대 이상 소비자들이 문구점에서 결제하는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문구의 기능적 가치는 줄어들지만 감성적 가치가 커지며 제품 카테고리의 성격도 변화한다.

 

소비자를 사로잡는 진실의 순간

휴먼 터치의 부상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손길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AI로 양산되는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앞으로 휴먼 터치는 일종의 ‘프리미엄’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최근 해외에서는 인간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람이 직접 쓰고 편집한 문학임을 인증하는 서비스, 시나리오 작성부터 영상 제작까지 AI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영화임을 인증하는 서비스 등 한 매체에서는 이를 ‘유기농 마크’에 비유하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결과물 그 자체보다 상품(콘텐츠)이 어떻게 생산됐는지 과정으로부터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AI는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구현하기 어려운 상상을 현실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다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기술력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전달되는 가치와 의미다. 우리 콘텐츠 혹은 브랜드에는 어떤 진정성이 녹아 있는가? 앞으로는 휴먼 터치가 드러나는 지점이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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