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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GING/Brand

케테 볼파르트_꺼지지 않는 시간을 팝니다

 

글 김도영 / 국내 대표 IT 기업 브랜드 기획자. 저서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 <기획의 말들>, <기획자의 독서>

 


 

12월 26일 아침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 있을까? 지난밤 화려하게 반짝이던 순간들은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우리의 흥을 돋우던 캐럴이나 트리 역시 잠잠해지는 날. 여전히 연말연시의 향기가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며 위안해봐도, 한 편으로는 묘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는 달력의 숫자 하나가 바뀌면 마법처럼 사라져버리는, 1년 중 가장 서운한 찰나의 순간과도 맞닿아 있다.

점점 약화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마케팅에서 '시즈널리티(Seaonality)'는 거스르기 힘든 법칙 중 하나다. 여름에는 패딩이 잘 안 팔리고 겨울에는 차가운 음료와 아이스크림의 매출에 한계가 있듯 기온이나 날짜의 영향을 넘어선 심리적인 계절이 소비자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시간의 법칙을 보란 듯이 뒤집은 브랜드가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에도, 새로운 기대가 꽃처럼 피어나는 3월에도 우리를 눈 내리는 12월 25일의 밤으로 안내하는 사람들. 바로 독일의 크리스마스 용품 브랜드 '케테 볼파르트(Käthe Wohlfahrt)'다.

 

 

따뜻한 고집이 만든 기적

위대한 브랜드 중에는 종종 숫자로 된 사업계획서가 아닌 사람을 향한 작고 따뜻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브랜드들이 있는데, 케테 볼파르트 역시 이 행보의 중심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낭만적인 이 이야기는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테 볼파르트의 창립자인 '빌헬름'과 '케테 볼파르트' 부부는 친한 미군 장교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독일의 전통 오르골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난 시기여서 소매점의 진열대에서는 겨울 장식품이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도매상 역시 난색을 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르골 하나만 팔 수는 없습니다. 최소 10개는 구매하셔야 해요."

보통의 경우라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선물을 찾기 위해 눈을 돌렸겠지만 이 부부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10개의 오르골을 모두 구매했다. 단 하나의 특별한 선물을 위해 9개의 재고를 떠안는 비효율을 감수한 것. 그리고 부부는 남은 9개의 오르골을 들고 미국 막사를 찾아가 행상을 시작했다.

 

케테 볼파르트를 있게 한 오르골은 지금까지도 계속 제작∙판매되고 있으며, 로텐부르크에 있는 본점은 1년 내내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 출처 @kaethe_wohlfahrt ⓒkaethe-wohlfahrt.com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르골을 본 병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힘겹게 군 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오르골의 태엽 소리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그리운 가족과 함께 보낸 따뜻한 크리마스의 기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르골이 동나는 광경을 보며 부부는 확신했다. '사람들은 오르골이라는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주는 위안과 행복을 사고 싶어 하는구나.' 그리고 이 작은 깨달음은 오늘날 전 세계에 '365일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는 콘셉트의 브랜드로 이어졌다. 효율보다는 낭만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택했던 이 부부의 다정한 고집이 케테 볼파르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평범한 문 너머 환상의 세계로

독일 로텐부르크(Rothenburg)에 있는 케테 볼파르트 본점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마법의 동굴'로 통한다. 철저한 단절과 몰입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가게 외관은 주변 중세풍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선물 상자를 가득 실은 빨간색 올드카 한 대가 서 있을 뿐 이곳이 거대한 ‘크리스마스 왕국’이라는 힌트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들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마치 <나니아 연대기> 속 옷장 문을 통과하듯 내부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크리스마스 마을이 펼쳐진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이트 트리와 천장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유리 오너먼트, 독일 전통의 호두까기 인형과 목제 장난감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크리스마스 용품과 과자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순식간에 12월의 어느 날로 돌아가고 만다. 미로처럼 꾸며진 동선에 갖가지 테마로 연출한 매장 시퀀스도 물 흐르듯이 이어져 압권이다. 그러니 바깥 세상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이곳을 찾는 사람이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케테 볼파르트의 시간은 영원히 12월 24일 밤에 멈춰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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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이트 트리, 수천 개의 오너먼트, 독일 전통의 호두까기 인형과 목제 장난감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크리스마스 용품에 둘러 쌓여 있으면 순식간에 12월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 출처 @kaethe_wohlfahrt / 이미지를 좌우로 클릭해 더 보기

 

이 때문인지 케테 볼파르트는 매장 매출이 높은 잡화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매장 수를 다 합쳐도 100여 군데 남짓이지만 그들이 만들어가는 오프라인 경험은 온라인 쇼핑으로 쉽게 대체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케테 볼파르트는 스스로를 소매점보다는 테마 파크에 가까운 브랜드로 정의하고 있다. 마치 놀이공원에 들어서면 일상을 잠시 잊고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들듯 케테 볼파르트를 찾는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크리스마스의 두근거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게 그들이 사명이자 전략이다.

 

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방법

케테 볼파르트가 60년 넘는 시간 동안 사랑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지켜온 본질에 있다. 그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저렴한 플라스틱과 화려한 LED 전구로 교체됐지만 케테 볼파르트는 전통을 고수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1991년부터 자체 제품 개발실을 두고 나무, 유리, 주석, 도자 등 자연에서 온 소재만을 사용해 장식품을 만든다. 숙련된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깎고 다듬고 칠한 공예품에서는 감히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온기가 느껴지는데, 이 따뜻함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가장 주요한 본질로 작동한다.

2001년에는 로텐부르크 본점에 '독일 크리스마스 박물관'까지 개관하며 크리스마스의 역사와 독일의 공예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까지 자처하고 나섰다.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기록의 역사에는 다툼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돈다. 독일인들에게 케테 볼파르트는 그저 단순한 크리스마스 용품 브랜드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더 잘 느끼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촉매제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그토록 기다리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응원한 덕분에 그들 역시 크리스마스 본질 한가운데 위치할 수 있게 됐다.

 

케테 볼파르트는 숙련된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깎고 다듬고 칠하는 과정을 거쳐 장식품을 완성하며, 그 과정을 고객들에게 정기적으로 공유해 신뢰를 쌓는다. / 출처 @kaethe_wohlfahrt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자

케테 볼파르트는 왜 1년 365일 내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팔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왜 다른 브랜드는 1년 내내 크리스마스 용품을 팔지 않을까?'를 생각해보면 된다. 당연히 크리스마스는 한 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일이 크리스마스일 수 있다면? 우리가 그 순간을 선물할 수 있고, 그 순간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방문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케테 볼파르트는 이 질문에 본인들만의 답을 완성했기에 지금과 같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흘러가는 시간의 파도에 올라타 경쟁을 이어갈 때, 케테 볼파르트는 그 시간의 한 허리를 떼어내 그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업으로 삼다 보면 늘 '새로움'과 '효율' 사이에서 이유 모를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이게 요즘 트렌드에 맞기는 한 걸까?', '이걸 하면 당장 조금이라도 매출이 개선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매 순간 우리를 괴롭힌다. 물론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브랜드와 비즈니스를 끊임없이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질문을 던져봐야 하는 순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파도에 올라타 다른 사람의 규칙으로 싸우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 우리의 규칙과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1년 내내 꺼지지 않는 케테 볼파르트의 트리처럼, 365일 연말연시의 행복함을 선물할 수 있는 그들의 노력처럼 우리 각자는 어떤 부분에서 우리만의 크리스마스를 만들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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